역대 한국 영화 시장 극장 관객수[1]

1910년대에는 수십만 수준이었다가 1930년대 중반에 400-500만 명, 1930년대 말에는 700만 명 수준에도 이르렀다.[2]

한국영화 외국영화 총계 인구(만 명)
연도 관객수(만 명) 점유율 관람회수(1인) 관객수(만 명) 점유율 관람회수(1인) 총관객수(만 명) 총관람회수(1인)
1965 0 0% 0 0 0% 0 12,170 4.2
1966 0 0% 0 0 0% 0 15,634 5.3
1967 0 0% 0 0 0% 0 16,408 5.4
1968 0 0% 0 0 0% 0 17,134 5.61
1969 0 0% 0 0 0% 0 17,304 5.5
1970 0 0% 0 0 0% 0 16,635 5.2 3,224
1971 0 0% 0 0 0% 0 14,630 4.4 3,288
1972 0 0% 0 0 0% 0 11,872 3.5 3,350
1973 0 0% 0 0 0% 0 11,462 3.4 3,410
1974 0 0% 0 0 0% 0 9,738 2.81 3,469
1975 0 0% 0 0 0% 0 7,560 2.1 3,528
1976 0 0% 0 0 0% 0 6,570 1.8 3,584
1977 0 0% 0 0 0% 0 6,493 1.8 3,641
1978 0 0% 0 0 0% 0 7,399 2 3,696
1979 0 0% 0 0 0% 0 6,552 1.7 3,753
1980 0 0% 0 0 0% 0 5,377 1.41 3,812
1981 0 0% 0 0 0% 0 4,444 1.2 3,872
1982 0 0% 0 0 0% 0 4,274 1.1 3,932
1983 1,755 39.80% 0.43 2,648 60.10% 0.66 4,404 1.1 3,991
1984 1,689 38.50% 0.42 2,703 61.60% 0.67 4,390 1.1 4,040
1985 1,644 34.20% 0.4 3,166 65.80% 0.78 4,810 1.2 4,080
1986 1,562 33% 0.38 3,166 66.90% 0.77 4,730 1.2 4,121
1987 1,311 27% 0.31 3,549 73% 0.85 4,860 1.2 4,162
1988 1,216 23.30% 0.29 4,007 76.80% 0.96 5,220 1.2 4,203
1989 1,115 20.20% 0.26 4,415 79.80% 1.04 5,530 1.3 4,244
1990 1,081 20.20% 0.25 4,265 79.70% 0.99 5,350 1.2 4,286
1991 1,106 21.20% 0.25 4,114 78.80% 0.94 5,220 1.2 4,329
1992 872 18.50% 0.22 3,839 82% 0.88 4,711 1.1 4,374
1993 769 15.90% 0.18 4,054 84.10% 0.92 4,823 1.1 4,419
1994 993 22% 0.24 3,842 79.50% 0.86 4,835 1.1 4,464
1995 944 20.90% 0.21 3,569 79.10% 0.79 4,513 1 4,509
1996 976 23.10% 0.19 3,244 76.90% 0.71 4,220 0.9 4,552
1997 1,212 25.50% 0.23 3,540 74.50% 0.77 4,752 1 4,595
1998 1,259 25.10% 0.29 3,759 74.90% 0.81 5,018 1.1 4,628
1999 2,172 39.70% 0.5 3,300 60.30% 0.71 5,472 1.2 4,661
2000 2,271 35.10% 0.42 4,191 64.90% 0.89 6,462 1.3 4,700
2001 4,481 50.10% 0.96 4,455 49.90% 0.93 8,936 1.9 4,735
2002 5,082 48.30% 1.07 5,431 51.70% 1.13 10,513 2.2 4,762
2003 6,391 53.50% 1.32 5,556 46.50% 1.15 11,947 2.47 4,785
2004 8,019 59.30% 1.65 5,498 40.70% 1.13 13,517 2.78 4,803
2005 8,544 58.70% 1.75 6,008 41.30% 1.23 14,552 2.98 4,813
2006 9,791 63.80% 2 5,549 36.20% 1.13 15,341 3.13 4,837
2007 7,939 50.00% 1.61 7,938 50.00% 1.61 15,877 3.22 4,859
2008 6,354 42.13% 1.28 8,729 57.87% 1.76 15,083 3.04 4,894
2009 7,641 48.68% 1.54 8,055 51.32% 1.62 15,696 3.15 4,918
2010 6,829 46.52% 1.35 7,851 53.48% 1.55 14,680 2.92 4,941
2011 8,287 52.00% 1.63 7,692 48.00% 1.51 15,979 3.15 4,977
2012 11,461 58.80% 2.25 8,027 48.00% 1.58 19,489 3.83 5,000

1 일제강점기 : 태동과 여명기[편집]

역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9년작 《의리의 구투》[3]'라고도 하나 이 작품은 100% 영화가 아니라 연극을 촬영한 혼합된 형식이었기에 이론이 있으며, 이로 인해 1923년작인 100% 극영화 《월하의 맹세》를 최초의 영화로 꼽힌다. 문제는 월하의 맹세가 조선 총독부 지시로 제작된 관제 영화라는 점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의 시금석이라 평가되는 것은 그 유명한 춘사 나운규1926년작 《아리랑》이다. 그 전까지도 3편의 영화 참여 경험이 있던 나운규는 불과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흥행, 완성도, 주제 의식,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4]까지 두루 갖추어 어디에 자랑해도 손색이 없는 이 걸작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기 손색이 없는 위업을 수립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인공을 포함해 감독, 각본까지 1인 3역을 도맡았다는 점이다!

나운규는 아리랑으로 한국 영화에 처음으로 묵직한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1927년에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해 그가 사망하는 1937년까지도 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6년작 《풍운아》, 1928년작 《사랑을 찾아서》, 1929년작 《벙어리 삼룡이》 등이 대표적이다. 30년대에는 흥행 참패에 따른 슬럼프로 방황하기도 했고 때로 일본의 영화사에 몸을 담았다가 지탄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영화에 대한 열의를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년인 1937년에는 《오몽녀》라는 걸작을 만들었으나 불과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이 소실되어 나운규나 당시 영화는 별로 남아있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랑 기념우표가 발행될 당시 우표에 수록된 장면이 아리랑 1편이 맞냐며 진위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5]

나운규가 10여 년에 걸쳐 불꽃같은 족적을 남기고 간 사이 한국 영화계는 한바탕 큰 혁신을 이룬다. 변사가 대사를 읊던 시절을 떠나, 비록 후시녹음이긴 하나 배우가 직접 대사를 내뱉는 발성영화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1935년작 《춘향전》이 최초의 발성 영화로 평가된다. 하지만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그들은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존재했고, 심지어 아직도 직접 변사를 경험했던 인간문화재급의 인물이 생존해 있다. 변사는 무성영화 시절 영화의 재미와 감칠맛을 더해준 스타였으며 지금의 인기 성우개그맨 이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고 극장마다 서로 모셔가려 안달이었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이자 영화 그나마 그 뒤로 해외에서 한국 영화 필름들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이 기록이 차례로 깨졌는데 남아있는 영화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는 안종화(1902~1966) 감독의 1934년 무성 영화 《청춘의 십자로》이다. 2007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외에서 발굴해내 복원하여 2008년에 변사 상영하기도 했고 여러 차례 추가로 재상영했다. 73분 정도로 상태는 꽤 좋은 복원을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전에 만든 영화는 모두 증발하고 없어졌다는 소리. 영화 《아리랑》 필름이 남아있네 뭐네 논란이 있었으며 어느 일본인이 이 영화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통에 더 논란이 거세진 적이 있으나 거짓이 드러나기도 했다. 2번째 오래된 영화이자 가장 오래된 유성 영화는 2005년 중국에서 발굴해낸 양주남 감독의 《미몽(1936)》인데 49분 정도 필름만 남아있고 상태가 매우 나뻐서 앞뒤 연결이 다소 안되는 게 흠이다. 이 작품도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곳에서 상영된 바 있다.

2 1950년대 : 전후 부흥기[편집]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한국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영화계는 침체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을 지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한국 영화는 그 사이 발전한 영화 기술과 사회적 인프라에 힘입어 해마다 폭발적으로 제작 편수가 증가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150여 편에 불과했던 한국 영화가 50년대 후반에는 1년에 100편 가까이 찍는 기염을 토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은 세련된 연출과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50년대 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또한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영화인들은 미국의 선진적인 영화 제작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고, 기득권이 없다시피 한 시점에서 신진 감독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후에 대감독으로 성장하는 신상옥 감독의 《막야》가 이미 한국전쟁 도중에 나왔고, 일세를 풍미한 김기영 감독이 데뷔한 것도 1955년이었다. 또한 자유부인의 대성공으로 인해 영화가 유망 엔터테인먼트로 급부상하면서 능력있는 인재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3 1960년대 : 리즈시절의 황금기[편집]

4.19 혁명5.16 군사정변이라는 진통을 겪으며 출발한 60년대는,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는 역량이 급속도로 끌어올려진 전성기였다. 60년대 초입부터 가족 멜로라는 독특한 장르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 장르의 대표작인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가 대흥행을 거뒀다. 《오발탄》처럼 당대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으나 이데올로기를 의심한 당국의 압박을 견디며 힘겹게 상영했던 작품도 있었다.

이때 정부 당국에서 마련한 영화법은 다소의 제약은 있었으나, 덕분에 영화의 인프라가 확충되고 전반적 질적 수준이 상향되어 소위 보따리 영화상들을 퇴출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60년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면 바로 1960년작인 김기영의 《하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칭송을 아끼지 않은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은 서스펜스 영화의 걸작이며, 안성기가 이 작품을 계기로 유망 아역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21세기 리메이크판조차 이 작품에 견주면 졸작이라는 평론이 수두룩히 나올 정도.

이 작품을 통해 여러모로 시대를 한참 앞서간 김기영 감독은 뒤에도 하녀 연작 시리즈를 찍는 식으로 매너리즘적 면을 보이긴 하지만, 거장답게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신상옥 감독과 유현목 감독도 이 시기를 풍미했으며 이 세 감독은 5~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도한 트로이카로 군림하였다. 또한 임권택, 정진우 감독도 이 시기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여담으로 이 당시에 제작한 전쟁 영화의 경우 사용된 무기 소품이나 전투신의 수준이 시대를 감안하면 매우 훌륭한 수준으로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와도 비견될 정도였다. 이유는 촬영에 한국군이 사용하던 실제 군용 장비를 사용하고, 실탄과 실제 폭약을 동원해서 전투신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리얼할 수밖에.(...)[6] 당시 전쟁 영화의 상당수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했었고 이를 위해 한국군 군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 1970년대 : 한국 영화의 암흑기[편집]

달이 차면 기운다지만 70년대의 한국 영화는 60년대의 찬란함에 비해 급속히 그 빛을 잃었다. TV의 대중적 보급이라는 위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외국 영화가 급속히 시장을 침범한 탓이 컸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미국 영화들은 기존의 한국 영화들을 능가하는 신선한 재미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았고, 그 탓에 한국 영화들은 외국영화 수입을 위한 쿼터제를 맞추느라 내용도 부실한 졸작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꾸역꾸역 양산되어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이런 악순환 탓에 한국 영화는 급격하게 도태되어갔고, 하길종 감독과 김호선, 이장호 감독 등 역량있는 신인들의 등장도 업계의 퇴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영화계가 한창 흑백에서 컬러로, 후시녹음에서 동시녹음으로 대대적 진화를 이루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1970년대 영화의 가장 큰 조류는 이른바 '청년영화'와 '액션영화'이었다. 70년대 후반 하길종 감독으로 대표되는 청년영화 장르는 당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하에서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하며 번민하고 고뇌하는 청년들을 그려내어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울렸으며, 관객들이 재미 본위를 추구하는 현 시점에서는 수요가 적어 인디 상영관에서나 걸릴 법한 내용임에도 당시에는 매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1975년에는 한국 영화사에 남을 걸작 청년영화 2편이 등장했는데 바로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7]과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70년대 젊은이의 뜨거운 낭만과 경직된 시대상을 잘 함축한 작품들로, 그 대담함과 구성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요즘 영화가 더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가 싶어 보일 정도이다.

이런 와중에 당시의 영화들은 누아르적 요소도 물씬하여, 말초적이고 남자 냄새나는 작품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서부 영화에서 착안한 만주 웨스턴이나 실록 김두한류의 일제시대 배경의 '협객영화'. 그리고 홍콩영화들에 자극받아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졌던 '권격영화'가 대표적인 장르. 17대 1 같은 클리셰라든가 《다찌마와 리》에서 희화화된 특유의 오글거리는 대사들도 이 시기 영화의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90년대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조폭영화의 아버지격이라 하겠다.

아무튼 70년대 지속적 침체로 60년대를 풍미한 거장들도 차츰 빛이 바래갔고, 늘그막에 등장한 유현목의 1979년작 《장마》 정도가 기존의 거장으로서 체면치레를 했다. 이제 한국 영화계에 앞날은 없는 듯 했다. 60년대와 비교하면 정말 강산이 바뀐 것이다.

5 1980년대 : 코리언 뉴웨이브[편집]

70년대부터 차츰 식어가던 한국 영화계는 뜻밖에도 3S정책이라 일컬어지는 정부 차원의 빵빵한 지원과 참신한 인재들의 출현이라는 호재 덕에 새로 중흥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 선봉에 서 있던 감독은 임권택으로, 70년대 내리 저급한 양산 영화만 찍던 것이 8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포텐셜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81년작인 만다라가 대대적 호평을 받았고, 1987년씨받이는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감독상을 거두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에도 1989년아다다아제아제바라아제 등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젊은 감성에 맞는 청춘 하이틴 작품이 많이 개봉했다. 칠수와 만수, 고래사냥, 우묵배미의 사랑, 첫사랑, 돌아이 등 당시 시대상의 파격을 달리는 신선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민주화에 힘입어 이념적으로도 전보다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 같은 아동 영화마저 선풍적인 히트를 쳤다. 그야말로 '새로운 물결'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시기였던 것이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영화들이 수두룩한 이 시기는, 비록 60년대만큼의 찬란한 리즈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가 쓰러지지 않게끔 버팀목이 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6 1990년대 :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등장[편집]

80년대 힘을 되찾은 영화계는 90년대 들어 외연에 폭발적인 팽창을 시작한다. 1993년 미국의 《쥬라기 공원》의 대히트로 인해 국가적으로 영화 산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히트작 역시 속출하면서 영화계에 많은 자금이 유입되었다. 1990년 6월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시작으로 하여 흥행작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1993년작 《서편제》는 단관개봉으로 무려 100만명이 넘는 당시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다. 지금도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의 계보에서 《아리랑》, 《쉬리》 등과 더불어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영화로 손꼽힌다.

영화에 컴퓨터 그래픽을 본격 도입한 《구미호》처럼 꽤 실험적인 시도도 많았고, 한국에서 절대 만들어질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판타지, SF 장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장르가 흥행과 비평에서 대박을 터진 작품은 1996년개봉한 은행나무 침대로, 탄탄한 각본과 제대로 된 기술력만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기술로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시망하긴 했지만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퇴마록》도 나왔다. 또한 강제규, 강우석, 박찬욱, 봉준호 등 21세기 들어 흥행감독이라 불리는 이들, 송강호, 한석규처럼 지금도 건재한 톱스타들이 데뷔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남부군》과 《태백산맥》처럼 탈이데올로기적인 작품들도 등장했고, 《여고괴담》처럼 새로운 감각의 공포영화도 출현하여 질적으로도 상향되었다.

또한 90년대는 60년대를 주도했던 감독, 배우들과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룸으로써 80년대의 파격적 분위기를 계승해 더한층 발전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는 해외에서도 양질의 작품이 다수 유입되어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존의 극장 체제가 멀티플렉스로 개편되기 시작해 이제 본격적으로 대기업이 영화 시장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비록 IMF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는 실험적인 시도와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쉬리》가 《타이타닉》을 꺾는 대흥행을 연출함으로써 한국 영화계에 남아있던 패배주의를 깨끗이 일소했다.

7 2000년대 : 천만 관객의 시대[편집]

Movie nara.JPG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룬 신르네상스기. 쉬리에 이어 또 한번 히트를 거둔 《공동경비구역 JSA》가 포문을 연 21세기부터는 영화관이 멀티플렉스 체제로 개편되어 대단위 관객 수용이 가능해지고 영화가 본격적인 대중 문화로 정착했다. 1990년대까지 30% 남짓하던 한국 영화 점유율이 2000년대에는 50%대를 오르내리면 점유율이 상승했다. 스크린쿼터제의 영향도 어느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는 주요 영화 제작국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비율. 헐리우드 영화에 대항해 자국 영화 점유율이 40%를 웃도는 나라는 인도, 한국, 프랑스, 가끔일본 정도이다. 일본 영화가 도전자로서 본격적으로 개봉에 들어갔지만, 우려와는 달리 이쪽은 만화에 비해 쪽도 못 쓰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다.[8]

그러다 2004년, 《실미도》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이 넘는 대박을 거둠으로써 영화계에 폭발적인 흥분을 일으켰다. 그것도 모자라 같은 해에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기록을 경신하여 영화계는 시장의 파이가 무섭도록 커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후로도 격년 단위로 꾸준히 《괴물》, 《왕의 남자》, 《해운대》 등의 천만 관객 작품이 출현했고, 그것들을 제외하더라도 해마다 한두 작품씩은 꼭 영화사에 기록될 성공을 거두는 영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살인의 추억》, 《과속스캔들》, 《국가대표》, 《추격자》처럼 슬리퍼 히트를 하는 영화가 부쩍 늘어난 것도 특징.

이처럼 영화계가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다 보니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클레멘타인》, 《다세포 소녀》 등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고도 흥행에 참패한 괴작들도 속출했다. 또한 현 시점에선 흑역사로 치부되는 《디 워》 역시 800만 넘는 관객이 들었음에도 제작비 회수에는 실패했다. 사실 천만 관객이 성립하기 전에도 《예스터데이》 같은 대자본 실패작들은 꽤 있었다.

5~60년대 일본영화나 80~90년대 홍콩[9], 중국영화와 같이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가 주목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은 산업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적 성취도와 장르적 실험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는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그에 따라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창동, 김기덕, 홍상수 등이 작가주의 영화로 소위 예술영화제를 휩쓸기 시작했고, 박찬욱, 봉준호, 임상수, 김지운, 류승완 등이 완성도와 실험정신을 겸비한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2003년은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초리즈시절.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홍련, 지구를 지켜라 등 장르영화 명작 반열에 오른 작품들이 이 시기에 개봉했다.

한편으로 《여고괴담》이 지핀 불꽃을 이어받아 슬래셔 영화 붐이 일기도 했다. 이는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캠퍼스 레전드》 등의 미국산 슬래셔 흥행에 힘입은 것으로, 물론 대부분 클리셰를 답습하려 들다 실패를 맛봤지만 한국 호러영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립영화의 약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잔잔한 양작들은 그간 마니아들의 전유물로만 인식됐으나, 2009년 《워낭소리》와 《똥파리》의 대대적 히트로 2000년대 말 독립영화 붐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8 현재 : 새로운 비전을 찾아서[편집]

00년대의 연장선에 있는 현 시점은 특별히 유별난 지각변동은 없다. 물론 《마당을 나온 암탉》이 200만 관객을 돌파하여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획을 그었고, 《도가니》가 영화라는 매체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등 크고 작은 이슈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바타》 이후 한국 영화계도 본격적으로 3D 열풍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2012년, 《도둑들》이 천만관객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또한 천만관객을 돌파하면서 2012년은 천만영화 두 편을 배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에 대해서 김기덕 감독과 같은 사람들은 대형 영화관을 소유한 배급사의 스크린 독점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영화가 한국인의 생활 속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되었다는 점은 한국 영화의 미래에 대단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2013년에는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가 칸 영화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단편)을 받으며 한국의 독립/단편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독립 영화 제작자 및 감독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며, 문병곤 감독은 인터뷰에서 독립영화의 제작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한국 영화는 분명 양과 질의 동반 성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환경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도 2011년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 이후 노동조합 결성, 표준근로계약서 보급, 페어 필름 등을 통해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10]

그 외에도 지나친 매너리즘과 상업화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전체적인 시장의 규모가 조금씩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쓰레기 영화(...) 역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메이저 배급사에서 제작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 중에서도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것들이 많고[11]봉준호, 박찬욱, 김지운처럼 예술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낚는 감독도 좀처럼 탄생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거론되는 감독은 윤종빈 정도이다.

2014년 상반기, 한국 영화의 약세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상태이다. 6월까지 400만명 이상 관객을 모은 영화는 《겨울왕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던 《수상한 그녀》가 유일. '한국형 느와르'라 지칭하며 장동건, 차승원 등 스타들을 앞세운 《우는 남자》, 《하이힐》이 《엣지 오브 투모로우》,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흥행 대참패[12]를 당하며 작품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스타 마케팅이나 자극적인 장면만으로 더 이상 관객들을 끌어모으기 힘들다는 교훈을 한국 영화계에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외화 강세 속에서도 이선균, 조진웅 주연의 한국 영화 《끝까지 간다》가 분전하였으며 2014년 하반기에는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바다로 간 산적》과 같은 대형 사극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9 한국 영화의 폭력성에 관하여[편집]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영화가 질과 양의 측면에서 급속히 성장하면서, 한국 영화를 대하는 종래의 시각에서 진일보된 비평을 내놓는 외국 평론가들이나 인문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지적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폭력욕설

미국의 영화 평론가인 그레이디 핸드릭스의 기고문이나, 프랑스의 작가이자 인문학자인 르 클레지오의 기고문을 보면 서구인들이 한국 영화의 강렬한 폭력성에서 낯설음과 강한 인상을 동시에 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을 위시로 한 30~50대의 제대로 된 감독들을 보면 그들의 영화세계, 한국사회, 그리고 폭력성이 각각의 감독들의 개별 작품들 사이에서도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 의한 폭력, 국가의 강요 또는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간의 사적 폭력은 현대 한국 영화의 주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이다. 서구권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폭력이 일회적이고 충동적이고 박제된 것이라면, 한국 영화에서의 폭력은 보다 더 구조적이며 습관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대개의 비평가들은 순탄치 못한 근현대를 보낸 한국 사회의 폭력성이 영화에 투영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김기덕, 박찬욱 등이 국내에서도 작가주의 감독 등으로 불리며 꽤 독특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위주로 한국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정작 한국 내에서 대흥행한 작품을 보면 《실미도》, 《살인의 추억》, 《친구》 정도를 제외하고 강렬한 폭력성을 수반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10 그 밖에[편집]

드라마와 더불어 국내에서 수요가 높은 영상 매체 중 하나이다. 다행히도 퀄리티 높은 영화일수록 한국 특유의 빌어먹을 사랑 타령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안 봐도 비디오스런 스토리는 나오지 않는다.

현재는 사극이 흥행력 면에서 명실공히 대세이며, 코미디와 스릴러가 그 뒤를 잇는다. 호러 영화의 경우 여름 특수로 몰려 개봉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괴작, 실패작 평가를 받는다. 전쟁 영화와 재난 영화도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나 연간 제작 편수가 드물고, 코미디 영화는 한국 영화 특성상 막판에 여지없이 억지감동 패턴이 나온다. 게다가 요즘은 호러, 코미디 장르의 영화도 그 수가 줄어드는 추세. 대신 의외로 괴수 영화가 간간히 나오고 있다.

2000년대 초에는 《조폭 마누라》나 드라마 《야인시대》를 시작으로 조폭미화물이 범람했지만 태생적으로 매너리즘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지금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친구》, 《비열한 거리》처럼 조폭물임에도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도 간혹 있었다.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을 거두면서 차츰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서양에서 90년대까지는 일본홍콩이나 인도이란을 제외한 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없다시피 했고[13], 90년대 초반 들어서서 중국 영화나 이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늘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김기덕, 박찬욱 등의 감독이 조명되면서 비로소 한국 영화가 서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부문에서는 아직 단 한번도 노미네이트(후보) 이력이 없고 유럽 3대 영화제인 ,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꽤 굵직한 수상 이력은 종종 있으나 2011년까지 최고상(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2012년 9월 9일(한국 기준), 마침내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3대 영화제 중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박찬욱이창동 감독조차도 이런 위업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걸로 마침내 한국 영화계의 오랜 숙업 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영화 자료에 대한 보존이 열악하다. 그나마 지금은 나아진 것이고 예전(겨우 80년대만 해도!)에는 원본 필름도 수출해 버리거나 헐값에 팔아서 필름이 밀짚모자 틀로 쓰이지 않나, 별걸로 재활용되거나 여의치 않으면 마구 태워서 처리했다. 광복 이전이나 이후 6.25 때까진 이해가 가도 5, 60년대는 물론 80년대까지도 영화 의들을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고전영화들이 넘친다. 한국에선 필름 자체가 사라졌다가 창고 구석에 박힌 게 발견된 적도 있고 감독의 유족, 소장가 또는 고물상이나 해외영화제로 출품된 필름들을 공수받아서 겨우 복원한 경우가 많다.(《오발탄》, 《빨간마후라》 등)

DVD블루레이 시장의 경우 한국의 IT 인프라에서 파생된 불법 복제로 인하여 계속 침체일로에 있다. 사실 다른 나라들도 스트리밍 서비스나 합법 다운로드 서비스가 널리 퍼지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도 광매체 시장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특히 미국넷플릭스훌루와 같은 OTT 서비스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IPTV 등의 유료 VOD를 통한 새로운 2차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11 관련 항목[편집]

  1. 자료 출처: http://www.kmdb.or.kr/statis/statis_04.asp
  2. 현재 출처를 까먹은 관계로 나중에 추가예정. 한국영화 인프라 관련된 소책자였는데 2010년 이후에 나온 책.
  3. '의리적 구토'라고도 한다. 여기서 구투는 '원한을 갚기 위한 싸움'이라는 뜻.
  4. 주인공인 미치광이 영진은 친일파에 악덕 지주인 오기호가 동생을 겁탈하려 들자 그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결국 오랏줄에 묶여 아리랑 고개 너머로 끌려간다. 주제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리랑.
  5. 이런 까닭에 우정사업본부는 이후 발행하는 영화 기념우표에 대해 진위 판별이 가능한 후기 영화들로 한정하게 되었다.
  6.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상륙전 장면 촬영 때는 군에서 특등 사수들을 차출해서 오조준하여 실탄 사격(...)을 해서 찍었고, 빨간 마후라 촬영 시엔 캐노피에 총탄이 박히는 장면을 위해서 배우 앞에 방탄 유리를 두고 실탄을 쏴서 촬영했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있다.
  7. 이 영화는 유신체제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상당히 검열을 많이 당해 편집되어 짤린 장면들이 엄청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고 흥행작.
  8. 다만 이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흐름과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다. 9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대중문화 개방단계에서 일본영화는 초기 예술영화위주로 개방되고 이후 상업영화가 추가되는 수순이었는데, 덕택에 초기에 수입된 일본영화는 《하나비》나 《카게무샤》 같은 예술영화들이었다. 애초에 대중성이 거의 없는 분야. 이후 대중성 위주의 《러브레터》가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대박까진 아니지만...
  9. 6~70년대라는 견해도 있다
  10.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출연료를 제외한 인건비가 너무 낮다는 점이 크다. 짝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식 영화들이 범람하느라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상승했는데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문제는 외면받는 상황이다.
  11. 괴물, 태극기 휘날리며7광구, 조선미녀삼총사를 비교하면...
  12. 2014년 6월 24일 기준으로 《우는 남자》가 598,861명, 《하이힐》이 336,418명을 동원하는 동안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3,990,104명,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4,297,505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참조.
  13. 특히 서구권에서 50~60년대에 일본 영화에 대해 보였던 관심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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