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а (우끄라이나)
러시아어: Украи́на (우끄라이나)
타타르어: Украина (우크라이나)
영어: Ukraine[1]

동유럽의 국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도네츠크 루간스크 트란스니스트리아
구 소련 구성 공화국 목록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몰도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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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공식명칭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 Ukrayina)
면적 603,628km² (크림 반도 제외시 582,628km²)
인구 4554만 7800명 (2013)[3]
수도 키예프
민족구성 우크라이나인 77.8%, 러시아인 17.3%, 크림 타타르인 0.5%
국가원수 페트로 포로셴코(Petro Oleksiyovych Poroshenko) 대통령
정부수반 아르세니 야체뉴크(Арсеній Яценюк) 총리
통화 흐리브냐
1인당 GDP 명목 3,621$, PPP 7,233$(2011)[4]
국가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
독립국 크림 공화국,도네츠크 인민 공화국,루간스크 인민 공화국,
하리코프 인민 공화국,드네프로 페트로 파블롭스크 인민 공화국

1 개요[편집]

동유럽에 있는 나라. 러시아 동쪽에서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명은 경계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건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크라이나는 국가라는 뜻이므로 우리의 국가라는 뜻이 된다.

수도는 키예프(Київ, Kiev). 우크라이나어 발음으론 키이우(/ˈkɪjiw/)라고 읽는다. 역사 시간에 러시아의 모태 국가인 키예프 대공국(키예프 루시)으로 유명하지만, 키예프 공국 전체 영토로 치면 상당히 남쪽에 있다. 또 그 바탕 민족이 바이킹인와 슬라브인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결국 이 키예프 공국을 공통조상으로 삼고 있다.

면적은 남한의 6배 크기이다. 국토가 비옥한 옥토로 이루어져 옛날부터 곡창 지대로 유명했다. 2011년에는 곡물 수출량이 세계 3위에 달했을 정도. 이렇게 농사가 잘 되는 땅에서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으니 주민들로서는 기가 막힐 수 밖에.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러시아어도 널리 사용된다. 특히 동부와 남부에서 러시아어가 많이 사용된다.

2 역사[편집]

바이킹족과 슬라브인들이 세운 첫 국가인 키예프 공국이 우크라이나의 시초이다. 그래서 이 키에프 공국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원조국이다. 한 마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한 뿌리다. 당시 세계구급 깡패였던 몽골(킵차크 한국)의 습격 때문에 키에프 공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이 지역은 투르크계 타타르인의 지배가 계속 이어졌고 남쪽 크림반도에는 크림 칸국이 들어섰다. 크림 칸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번국이라서 이슬람계인 몽골-투르크(타타르) 세력이 계속 지배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키에프 공국 이후 계속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우크라이나인의 슬라브족 국가는 자라나지 못했다. 그러나 멀찍이 북쪽인 모스크바 지역은 투르크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대문에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러시아가 된다.

투르크 세력이 못 미치던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코사크 국가가 성립했지만 폴란드가 뜨던 당시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먹히고, 폴란드가 저물자 이번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분할한다. 한편, 동부 우크라이나는 오스만 투크르제국이 계속 지배하다가 17세기에 급성장한 러시아 제국이 투르크와 10여번에 걸친 전쟁을 벌여, 끝내 19세기까지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모든 동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역에 들었다.[5]

러시아는 이후 폴란드를 분할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까지 차지해[6]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통치아래서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동부와 서부 우크라이나는 같은 민족임에도 수백년간 따로살면서 종교-정서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투르크의 압제를 러시아가 해방시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지배를 받으며 어느 만큼 서방화해 러시아를 이질적으로 생각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 지역은 잠시 독일 세력권에 할양되었지만 곧 독일 제국이 패망한 뒤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어서,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민족주의자·극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 제각각 무장하여 쟁투를 벌였다.

이후 (동)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공산국가는 아니다!)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고,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방은 적백내전에서 백러시아에 가담했다. 동서 우크라이나는 곧바로 1920년에 통일을 선언하나, 막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친폴란드 우크라이나인들(주로 서부인)의 요청(+ 자국의 팽창주의)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에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없었다) 도움을 청하면서 공산러시아와 폴란드가 맞붙은 소련-폴란드 전쟁이 났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참패했기 때문에 1921년 리가조약을 맺으면서 서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에 할양, 이곳은 다시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남은 동부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가입하여 한 공화국이 된다. # 이 복잡한 과정은 이 링크를 참고하자.

러시아에 가까웠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련에게 철저히 탄압을 겪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인 레프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자란 유대인이었는데,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사투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다른 나라가 아닌 그저 자국 변방의 하나생명선?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푸틴도 마찬가지.

이런 우크라이나 탄압은 트로츠키와는 앙숙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에서 큰 애로사항이 꽃피어서(...) 초절정 아귀지옥으로 바뀌어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아픈 역사가 있다. 바로 1932년~1933년우크라이나 대기근이다.[7]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진 대공황에 건 뿌리깊은 공포 이상으로 우크라이나가 기근에의 공포심은 크다. 이는 러시아에 건 반감의 연원이기도 하다. 다만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는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빵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러시아인 인력이 다수가 이주해와서 살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바로 이렇게 우크라이나에 이주해 와서 (태어난) 러시아인 광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에 속하던 서브 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련이 합병한다.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키면서 1921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물론 서부인들은 이런 소련의 지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을 개전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한 초기에 이들을 해방자로 환영했지만, 수탈과 기아, 민간인 학살 등이 나오자 반독으로 돌아선다. 전쟁 기간 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기로 독일과 러시아 양쪽에게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문에 전사자 포함, 약 70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8] 안습.

2차대전 뒤 연합국의 대지분을 보유한 소련은 폴란드의 항의에도 1939년 합병한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확정했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영토를 할양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원래부터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게 별로 명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를 달가워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동부-서부의 다른 역사는 이후 큰 갈등의 씨앗이 된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서남부 5개 주(리비우[9][10], 테르노필, 이바노프란키우시크[11], 자카르파티야, 체르니우치)는 1939년, 또는 1945년까지 러시아/소련 땅이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했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소련 영토로 들어왔다. 이들에게 러시아는 철저히 외부세력일 뿐이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해안지대는 이 때부터 우크라이나의 영역이다.[12]

1954년에 출신자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게 받는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110만명을 차지한다. [13] 이후 1991년, 소련에서 쿠데타가 실패한 틈을 타 독립에 성공한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개념은 소련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나왔으나, 사실상 2개의 민족에 가까울 만큼 지역별로 러시아에 입장이 다르다. 키예프가 있는 내륙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공업도시 하르키우(제2도시, 러시아어 하르코프)와 항구도시 오데사(제3도시), 크림 반도 등이 속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지지정당부터 민족, 언어 구성까지 제법 다르다.[14] 그래서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반감이 상당히 심한 반면, 러시아와 붙어있는 동부 일부 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서쪽에 있는 폴란드와 일단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부를 집어삼키던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잃어버린 자기들 땅이라고 여기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견제하고 있다.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와는 사이가 나쁜데 벨라루스가 과거 키예프 공국으로 같은 동족이면서도 여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인 편이기 때문. 둘이 과거 키예프 공국 이야길 하며 서로를 옛 우리땅이라 까고, 벨라루스는 친러시아(친러) 정책이니 우크라이나와 사이가 나쁘다.

3 경제[편집]

4 지리[편집]

흑해 연안에 있는 오데사(Одеса) 항구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유명한 영화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의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이 찍힌 곳으로 유명하고[15], 건담 시리즈의 '오데사 공방전'이 일어난 곳이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터널군인 '오데사 카타콤베'가 있는 곳이다. 길이만 2,500km 이상이라고...근데 이 기록은 중국 서부 핵미사일기지인 '지하 만리장성'에 의해 깨진 듯하다. 무려 5,000km 이상의 길이라고.

저 위 지도에 보이는 세바스토폴항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함대보고 "방 빼!"라면서 한동안 키배를 벌이다가 구 소련의 수상함을 일부 양도받는 조건으로 2014년까지 임대시기를 연장해줬는데,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2042년까지 대여기간이 늘어났다.

시간대가 비슷한 경도에 위치한 벨라루스와 러시아보다 빠른 시간대를 쓴다. 그래서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으로 가면 시간대가 더 늦어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두 시간이나 빨라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시간대가 경도에 비해 이상하게 느려서 그런 거지 우크라이나는 오히려 실제 시간에 가깝다.

주변에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다양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러시아의 천연가스 파이프가 이 나라를 지나고 있다. 때문에 러시아가 가스잠가라 마법을 부릴 경우 크게 피해보는 나라 중 하나. 현재는 EU 국가들 투자로 새로운 나부코 파이프라인을 부설중이...었다.

지도상의 북쪽, 벨라루스와의 접경지대에는 그 악명높은 체르노빌(Чернобыль)이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그 체르노빌이다. 참고로,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어로는 초르노빌(Чорнобиль)이라 불린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 좀더 이야기 하자면, 1986년 4월 원전 폭발당시 하마터면 인구 200만의 수도 키예프를 고스란히 버려야 할 정도의 헬게이트가 열릴 뻔했었다. 체르노빌에서 겨우 100km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자칫 증기폭발로 원전 바닥이 완전히 녹아버리면 키예프의 상수원인 드네프르강은 그대로 방사능 홍차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잠수부들의 목숨을 바친 희생으로 원전의 냉각수를 모두 빼낸 후 극적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할수 있었다. 그리고 헬게이트는 당시 풍향 때문에 낙진을 고스란히 맞은 벨라루스에서 열렸다...

동부 지역은 친러적이고, 서부 지역은 반러적인 성향이 강하다. 2010년 대선에서 당선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동부의 도네츠크 주에서 무려 90.44%를 득표했으나 서부의 이바노-프란키우시크 주에서는 겨우 7.02%를 득표했다.

위치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서방과 러시아가 이 나라를 놓고 정치적 패권 싸움을 하고 있다. NATO가 발틱 지역과 남, 서동부 일대를 애워싼 지금 우크라이나까지 NATO 손에 넘어가면 러시아는 서방의 MD에 삼면의 영토가 노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려는 걸 수단방법 안 가리고 막으려 하고 있다. 만일, 러시아의 지도자가 우크라이나를 서방에게 빼앗긴다면, 그 지도자는 "기록말살형을 당할 것."이라고 러시아학 전문가들이 말한다.

5 사회[편집]

2014년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종합순위 6위를 차지했다. 사실 쓸만한 인재는 많은 나라다.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과 엘리트층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게 문제.(http://www.imo-official.org/year_country_r.aspx?year=2014)

2009년 11월 17일 인플루엔자 A보다 치사율이 높고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현재까지 키예프와 르비프시 지역에 약 100만명 감염에 약 2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감기 바이러스와 캘리포니아 인플루엔자가 합쳐진 변종 바이러스로 밝혀졌다{(http://www.ilgankg.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700 관련기사)}. 그러나 WHO측에서는 변종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변종설을 일단 부정 중. 그러나 과거 인플루엔자 A가 창궐할 때 멕시코가 각종 삽질로 인해 바이러스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공을 세웠던 데 반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경 일부를 봉쇄하는 등 신종 바이러스 출현에 대처를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1 인구[편집]

인구 면에서, 아니 생존 자체에서 비참한 경험을 했던 나라. 우선 1930년대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다. 1933년의 평균 수명이 남자 7세, 여자 10세라는 정말 말도 안되는 수준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기근을 넘겼나 했더니 이번에는 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그 통에 엄청난 사람이 죽었다. 7백만명이 전쟁 중에 죽었는데, 이는 당시 인구수의 1/6 이 넘는 숫자다. 그로 인해 1941년~1944년의 기대수명은 남자 15세, 여자 25세에 그쳤다. 네?

인구는 2013년 1월 기준 4,547만 명이며 1995년 5200만명을 넘긴 이래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다. 이는 소련붕괴 이후 크게 낮아진 출산율(천 명당 11.4명)과 높은 사망률(영아 제외시 천 명당 6.1명)을 기록하는 인구구조를 띄기 때문으로, 영아 사망률(천 명당 8.4명)이 특히 높다. 출산율이 1.53으로 낮은 것도 이런 높은 영아 사망률에서 기인한다.

이민 나가는 사람도 많고 이민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 1991년~2004년 동안 220만 명이 우크라이나로 이민을 왔고, 250만 명이 이민을 떠났다. 이민 온 사람이 많다 보니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4.7%가 이민자 출신이다.

평균 수명이 감소하고 있다. 술, 담배를 많이 하는데다가 환경 오염에 열악해진 보건 정책 등이 겹쳐서 2012년 기준 세계 제2위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천명당 15.76명이 사망.

총 인구의 77.8%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 외에 러시아인이 17.3% 되는데 이들은 주로 동부와 남부에 거주한다. 서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거의 단독으로 사용되며 수도 키예프를 비롯한 중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둘 다 사용된다. 나머지 4.9%의 소수민족은 0.8%의 몰도바계-루마니아계, 0.6%의 벨라루스계, 0.5%의 크림 타타르계, 기타 불가리아계, 헝가리계, 폴란드계, 유대계, 아르메니아계 등이다.

5.2 종교[편집]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988년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가로질러 흐르는 드니프로 강에서 세례를 받은 이후 수세기 동안 키예프는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동방 지역에서 기독교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종교적으로는 2004년을 기준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예프 총대주교청) 39.8%,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 29.4%,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16] 14.1%,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 2.8%, 기타 라틴 전례 로마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이 4.9%이고 무교 인구는 9%이다.

구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크바 총대주교 산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이 분열양상을 보면 지리적 분열양상과 거의 일치한다.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키예프파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는 모스크바파가 각각 우세를 보이는 것이다.

현재 동방 정교회 내에서 교회법상 위치를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유일한 교회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뿐이다. 다만 설문조사의 주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이 더 우세한지, 아니면 그 라이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예프 총대주교청)이 우세한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자들 상당수는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특별히 구별하지 않으며, 참석하는 성당의 소속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게 따지면 중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정교회 인구가 72%로 절대 다수이고, 여기에 서부에 주로 분포하는 그리스 가톨릭교가 14.1%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상당수 정교회가 실질적 총대주교 관할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가톨릭의 경우, 1596년 우크라이나의 일부 정교회 주교들이 투표로 교황과 일치하기로 결의한 '브레스트 연합'[(Union of Brest)으로 고대 동방 교회의 전례와 신학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교황을 자신들의 수장으로 받드는 동방(비잔티움) 전례 가톨릭교회라는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정교회 쪽에서는 이들을 '연합파(uniate)'라는 다소 경멸적인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들은 1774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 의해 '그리스 가톨릭'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리스 가톨릭교도들은 독일군을 자신들을 공산주의 소비에트로부터 해방시켜 줄 군대로 환영했다. 이 일로 이들은 나치 협력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종전 후 1945년 스탈린은 이들을 정교회에 강제 편입시킨다. 1946년 다수의 사제와 주교들이 수용소에 감금된 상황에서 소비에트의 사주를 받는 교회회의에 의해 1596년의 브레스트 연합 파기가 결의됨으로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후 40년 이상 지하 교회와 디아스포라로 그 명백을 이어오던 이들은 1989년 소련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즈음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옛 교회 재산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되찾는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 다시 그 힘을 결집하고 있다.

5.3 언어[편집]

UkraineNativeLanguagesCensus2001detailed-en.png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전체 우크라이나 인구의 67% 사용). 동슬라브어파러시아어와 매우 밀접하다. 간단히 말해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를 반반 섞으면 우크라이나어"라 카더라. 수도인 키예프에서는 오히려 러시아어가 더 널리 쓰인다 한다. 가까운 언어라서 그런지 우크라이나어로 말걸면 러시아어로 대답하고 그러는 일도 흔하다. 러시아어 사용자는 30%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민족보다 우크라이나어 사용자가 더 적은 편인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이면서도 15% 정도인 554만 명은 러시아어를 쓰기 때문이다(전체 러시아어 사용자의 40% 가량을 차지). 하지만 그럼에도 지도에서 보듯 크림 반도와 일부 동부지역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어가 강세인 지역이 많다.

Meeting in Kharkov.jpg
Русский язык - не иностранный,
러시아어는 외국어가 아니며,
А мы - не иностранцы!
우리 또한 외국인이 아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어의 우위가 강조되면서, 러시아어를 주로 쓰는 주민들은 차별받는다고 느껴 러시아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포함한 소수민족어를 지역공식어로 인정하는 법률이 폐지되면서 인구의 10%이상이 사용하게 되면 지역 공식어로 정해졌던 소수민족어는 지역 공식어 지위를 박탈당할 뻔 했으나 투르치노우 대통령 권한대행이 해당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20일의회에서 다시 러시아어가 제2국어로 지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근데 2014년 10월 3일에 리비우를 방문한 포로셴코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영어에 특수지위를 부여해야 하고 제2외국어로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2015년 2월 3일,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유일한 공식어는 우크라이나어가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통계에서 보듯 3%의 주민은 우크라이나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언어를 제1언어로 한다. 루마니아어(몰도바계 18만 + 루마니아계 14만 = 32만), 크림 타타르어(23만)과 헝가리어(15만), 불가리아어(14만)가 대표적. 몰도바계와 불가리아계는 러시아어를 쓰는 인구도 상당하다.

한편 민족어 사용빈도가 낮은 민족들도 있는데, 폴란드계(14.4만)는 대다수가 비슷한 우크라이나어에 동화되어 10만명 가량이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유대인(10만)과 아르메니아인(9만)들은 각각 8.5만, 4.3만명이 러시아어를 쓴다.

6 군사[편집]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2월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인수한 장비와 병력을 재편성하여 독자적 군대를 창설했다. 소비에트연방의 16개 군 관할 구역 중 키예프, 오데사, 자카르파티아 등 3개의 군 관할구를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인수 당시 병력은 78만 명으로 유럽 내 1위였다. 또한 소련시절의 핵무기도 그대로 물려 받았는데 독립당시의 핵무기 보유량은 세계 3위였다.

하지만, 현재는 구소련에서 독립 당시보다 군사력이 매우 줄어들었는데, 1991년 2011년의 군사력 비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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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우크라이나는 징병제를 폐지했다. # 로이터 올해의 사진 하지만 크림 위기의 여파로 2014년 5월 1일 공식적으로 징병제 폐지를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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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남자" 등의 제목으로 한국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유행하던 사진. 하지만 2014년 초에 우크라이나 내외의 정세가 불안정하게 되는 바람에 농담이 더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징병제 폐지가 연기됐다.

6.1 총기 수출 강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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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방송에서 누구나 쉽게 총을 살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땅파면 총이 나올 정도는 아니어도 총이 흔하긴 한 듯. 그 결과는 유로마이단 당시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에서 입증되었다.

분리독립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전략적인 사유로 90만의 현역병력과 100만명 이상을 위한 전략예비물자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당연히 우크라이나 신정부는 이걸 유지할 돈이 없었고 게다가 필요하지도 않아 90년대를 통해 예비물자는 물론이며 현역장비까지 해외에 유출되었다. 물론 필요하지 않다는 건 당시 기준이고 현재 와서 보면 그 물자를 싹 팔아넘긴 덕택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진격에 맞설 힘이 없어진 것 같다고는 하지만... 사실 소련 해체 당시의 대병력은 우크라이나 군이 아니라 소련군의 일부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독립 당시 군대를 축소한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소련 해체당시 우크라이나에 과도한 병력이 배치된 이유는, 이곳이 원래부터 독소전쟁 이래로 격전지였던데다가 [17] 냉전시에는 나토 제2전력의 하나였던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 좀 과하게 밀집된 경향이 있었다. 소련군으로부터 알짜전력을 물려받은 러시아군조차 500만 대군으로부터 90년대 30만 이하로 내려갈 정도의 막장(현재도 러시아군 총병력은 70만밖에 안된다)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소련군으로부터 물려받은 90만 대군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고, 당시 군수물자를 팔고, 군비를 축소한건 안목이 짧았던게 아니라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군사나 방위의 실패가 아니라 국내 정치의 실패였다.

특히나 우크라이나에 있던 AK-47 수백만정이 유출된 것으로 보이며 90년대부터 21세기까지 아프리카와 중동의 분쟁지역에 나도는 "새" AK소총은 거의 절대다수가 우크라이나에서 유출된 소련제였으며 20년간 상당량이 소모(!)되어 현재는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한다.[18]

무기 같은 "유용한" 물건이 아닌 옷이나 잡다한 장비같은 군수품 창고들은 사실상 방치되다가 차근차근 리인액트먼트 용품으로 팔아먹기 위해 업자들이 창고째로 매입해다가 팔고 있다. 지금도 이베이에서 그 물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직접 사본 사람의 경우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물건에서 엄청난 냄새가 나기에 스탬프를 확인하니 1972년도였다고 한다.

7 정치[편집]

대통령총리가 있는 이원집정부제 국가이다. 대통령 임기는 5년으로 1회 연임이 허용된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현재 우크라이나는 이 국가가 중세이후 처음으로 독립한 국가라는 점이다. 즉 몽골침략으로 키에프 공국이 몰락한 13세기 이래 오스만투르크, 러시아, 폴란드, 소련의 지배를 골고루 받다가 최초로 처음으로 성립된 완전한 독립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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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정치권은 통치방식이라던가 대화와 타협이라는 문화가 발달되지 못했으며, 정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국가분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여파로 국회 공성전이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이기도 하다. [19]

7.1 역대 지도자들[편집]

  • 레오니드 마카로비치 크라우추크(우크라이나어: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러시아어: Леони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1934년 1월 10일 ~ ) -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 해체에 합의, 소련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이다. 1934년 1월 10일 태어났다.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정치국원이 되었고, 1990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인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곧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소비에트 연방 구성 공화국으로서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12월 5일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곧 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쳐, 12월 8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지도자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합의하였다.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992년 8월 정식으로 취임하였으나, 체제 변환기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경제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1994년 선거에서 레오니드 쿠치마에게 패해 물러났다.
  • 레오니드 다닐로비치 쿠치마(우크라이나어: Леонід Данилович Кучма, 러시아어: Леони́д Дани́лович Ку́чма. 1938년 8월 9일 ~ ) - 우크라이나 2대 대통령. 1938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르니히우 주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대학교 물리 기술 학부를 졸업했고,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에 있는 유주마 시에서 일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고 1991년 8월의 보수파에 의한 8월 쿠데타 이후 공산당을 탈당했다. 1994년 대선에서 동부의 지지로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9년 대선에서 서부의 지지로[20][21]재선하며 유럽연합과 미국,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전임 크라우추크 대통령이 말아먹었던 경제분야를 개혁하며 발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밀경찰을 운용하면서 정적과 언론을 탄압하는 폭압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하며 민심을 잃었다.[22] 그래도 막장이었던 자국 경제를 어느 정도 복귀시켜 놓은 공은 부정할 수 없고, 이 양반일 때가 우크라이나 리즈 시절이었다. 그리고 자기 임기가 끝나자 자연스레 내려왔다. 2번의 대통령직을 연임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이 사람이 유일하다.
  • 빅토르 안드리요비치 유셴코(우크라이나어: Віктор Андрійович Ющенко, 러시아어: Ви́ктор Андре́евич Ю́щенко. 1954년 2월 23일 - )는 우크라이나의 3대 대통령이다. 정치인으로서 우리 우크라이나당의 지도자였다. 1954년 2월 23일,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미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안드레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출정했으나 대소전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되었다. 2005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총리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한편 오렌지 혁명의 성공으로 율리야 티모셴코를 지지하여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2010년 1월 17일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 빅토르 페도로비치 야누코비치(우크라이나어: Віктор Фе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 러시아어: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 빅토르 표도로비치 야누코비치, 문화어: 윅또르 야누꼬비치. 1950년 7월 9일 ~ )는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이다. 야누코비치는 1950년 7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예나키예베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에 절도와 폭력으로 17살이 되던 1967년에 3년간 소년원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72년 버스 회사에서 전기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후 도네츠크 기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80년 졸업 직후에 예나키예베에서 운송 회사의 최고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1990년대 초반 정치에 입문하였고, 소련이 붕괴되었다. 이후 동부 공업지대인 도네츠크 주 주지사를 지냈다. 친러시아 성향의 지역당에서 활동하며 도네츠크 주지사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2002년 총선에서 지역당이 포함된 연정이 중앙 정권을 잡아 그도 입지를 굳혔다. 2002년 11월, 총리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2003년부터 지역당 당수를 지냈다.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빅토르 유셴코 후보와 격돌했으며, 1차 투표에서는 근소한 차로 유셴코가 앞섰으나, 유셴코와 야누코비치 모두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11월, 결선 투표가 치러졌다. 개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46%의 득표로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선거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유셴코 후보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등 큰 논란 끝에 12월 26일 재선거가 실시되어 결국 유셴코가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자, 이번에는 야누코비치 후보 지지자들이 반발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고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야누코비치는 2005년 1월 총리직에서도 축출되었다.
그 후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은 2006년 3월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국은 다시 여당과 야당의 대립으로 불안이 계속되었다. 지역당은 친러시아 성향의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 2006년 8월에 야누코비치는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고, 야누코비치의 정적이었던 유셴코 대통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이후로도 정국 불안은 계속되어 유셴코 대통령은 2007년 4월 국회 해산을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기 총선이 치러졌다. 조기 총선에서 그의 지역당은 제1당의 자리는 유지했으나, 율리야 티모셴코가 중심이 된 다른 당들이 연정을 구성하여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고, 티모셴코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다시 지역당 후보로 선출되어 선거에 출마했다. 야누코비치는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랐으나,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와 결선 투표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도 극심한 정파, 지역, 민족간 대립으로 매우 심한 혼란이 있었으며, 결선 투표 결과 48.95%의 득표율로 최종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야누코비치는 2010년 2월 25일,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야 티모셴코 내각은 해산되었으며, 야누코비치의 측근인 미콜라 아자로프가 지역당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후 티모셴코 전총리는 직권 남용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고, 친러시아와 친EU를 사이에 놓고 정국 불안은 계속되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아자로프 총리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서부와 키예프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며, 2013년 하반기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그는 유화책으로 아자로프 총리를 해임하고, 야권 인사들의 사면을 발표하고 EU와의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하였고, 최종적으로 야권 대표와 휴전의 합의했으나,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으며, 야권은 더욱 강하게 반발하여 키예프와 의회를 점거하자, 야누코비치는 키예프를 떠나 도주하였다. 이 일로 여당도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2014년 2월 22일, 국회는 그를 인권침해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탄핵을 가결하여 그는 대통령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그는 러시아로 잠입하였다가 2014년 2월 28일,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최고의회인 라다가 2015년 2월 4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대통령 직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야누코비치는 공식적으로 대통령 직위를 잃고 전임 대통령으로서 특권과 혜택도 누릴 수 없게 됐다.
  • 페트로 올렉시요비치 포로셴코 (우크라이나어: Петро Олексійович Порошенко, 러시아어: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Пороше́нко. 1965년 9월 26일 ~)는 우크라이나의 백만장자 사업가이자 우크라이나의 제5대 대통령이다. 포로셴코는 1965년 9월 26일 오데사 주의 볼흐라드 시에서 태어났지만1 우크라이나 중부의 빈니차 시에서 자랐다. 그는 1989년 키예프 대학교의 국제관계 및 법학부 (뒤이어 국제관계학회)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졸업 후 포로셴코는 카카오 열매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그는 과자 기업 몇 곳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로셴 그룹과 합병하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과자 생산 기업을 만들었다. 포로셴코는 제과업계에서 성공을 거두어 '초콜릿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포로셴코의 기업은 여러 곳의 자동차 및 버스 공장, 레닌스카 쿠즈냐 조선소, 5 카날 텔레비전 채널을 비롯한 다양한 기업을 포괄하고 있다. 2012년 3월, 《포브스》는 포로셴코를 포브스 세계 부자 순위 중 10억 달러의 재산으로 1,153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외교부 장관, 2012년에 경제발전통상부 장관을 지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는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을 이끌었다. 정치 외에도 포로셴코는 다른 여러 회사들을 포함한 대규모 과자 사업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그에게 '초콜렛 왕'이라는 별명을 얻도록 했다. 그는 2014년 5월 25일 1차 투표에서 55%에 달하는 표를 획득했고, 그 때문에 당선이 확실시되어 2차 투표를 하지 않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훗날 행적은 추가바람.

7.2 2004년 오렌지 혁명[편집]

이때부터 우크라이나의 경제 막장의 서막이 열렸다.

쿠치마가 임기만료에 따라 물러나면서 치르게 된 2004년 대선은 쿠치마의 후계자 격인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Віктор Янукович)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시첸코(Віктор Ющенко)[23] 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대선을 두달 반 정도 남겨둔 2004년 9월 5일, 유시첸코 후보는 독살을 당할 뻔했고, 미중년 간지남이었던 그의 외모는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팀 마르코처럼 변해버렸다. 안습... 사건 후 유시첸코의 혈액에서는 기준치의 1천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 이 암살기도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이고르 스메쉬코 전 국장, 블라디미르 사추우크 전 차장과 식사를 한 후 일어난 것이었으며, 유력한 용의자로 우크라이나 보안국이나 러시아 측에서 친러파 후보인 야누코비치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식에 다이옥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란 의혹을 받았다. 구사일생으로 유시첸코는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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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after 최근엔 안경 착용과 치료로 많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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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해 11월 대선 결선투표 결과는 야누코비치가 49.53%, 유시첸코가 46.6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되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지만 유시첸코와 러닝메이트인 율리야 티모셴코 지지자들은 투표에서 부정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불복, 대규모 시위를 벌인 끝에 야누코비치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일명 '오렌지혁명'이다.

그렇다고 서부 우크라이나가 집권한 이후 잘했느냐? 전혀 아니었다.

유시첸코 대통령과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으로 돌변해서 해임과 재신임을 반복했고, 티모셴코가 총리에서 짤렸을 땐 야누코비치가 총리로 임명되기도 했다. 집권 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경제는 나락테크를 타고... 그나마 자기들끼리 싸움질하던 정부는 그래도 기본 베이스가 친서방이었기에 유시첸코 정부는 적극적인 친서방 정책에 NATO에 가입까지 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가스밸브를 잠그는 마법을 시전하며(...) 서유럽에 보여줄 시범케이스로 우크라이나를 털어댔고, 결국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나라 꼴은 완전히 막장이 되었다. IMF가 지원을 하였으나, 우크라이나는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추가타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조지아미국NATO의 힘을 믿고서 러시아를 건드려서 조지아 vs 러시아의 전쟁이 터진다. 조지아가 먼저 선빵을 날려서 전쟁이 벌어지자 정작 나토와 미국은 나몰라라 했고, 조지아는 말 그대로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개패듯이 얻어 맞았다. 개전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소총 한자루마저 싹다 무장해제를 당하고 탈탈 털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구소련 출신 주변국들에게 "봤냐? 새끼들아! 알아서 기어라!"하고 사자후를 날렸고, 소련 붕괴 이후 친미, 친서방 노선을 취하던 구소련 출신 주변국가들이 이 상황을 보고 러시아에게 쫄아서 선거에서는 친미, 친서방 정권에서 죄다 다시 친러정권으로 정권교체가 된다.

위의 상황은 우크라이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반동으로 결국 2010년 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야누코비치 전 총리가 유시첸코는 물론(1차투표 탈락) 2차투표에서 티모셴코 역시 꺾고 당선이 되면서 향후 다시 친러시아 국가로 전향을 하게 되었다. 당장 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나토 가입을 철회했고, 특히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2010년 4월 흑해 주둔 러시아 해군의 철수도 취소하고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장시켰다.

독재정권에서 비롯된 정당과 자유주의 개혁 정당의 양당제 대결구도라서 그런지, 대한민국이나 대만과 정치 구도가 많이 비슷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국회 패싸움도 심심치않게 종종 벌어진다.(...).예를 들면 이런거(...).

2005년 WBC 세계 챔피언(!)인 비탈리 클리츠코가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구경하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링크 그리고 2014년 4월에는 아예 비탈리 클리츠코 자신이 국회 패싸움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기사링크[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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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2010년 대통령 선거. 적색이 티모셴코, 청색이 야누코비치)만 봐도 알겠지만 지역에 따라 친러성향과 친서방성향이 극명하게 갈리는 나라이다. 결선투표메서 티모셴코는 서부 지역에서 최대 91%, 야누코비치는 동부 지역에서 최대 93%를 득표했는데,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는 기권표도 집계하는 걸 감안하면 93%면 한국 기준으로는 95% 넘게 득표한 셈이다.

그리고 결국 다시 한 번 일이 터지고 말았다.

7.3 유로마이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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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8일 우크라이나 독립광장에서 벌어진 반야누코비치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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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것은 유로마이단, 2014년 크림 위기, 2014년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 참조.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러시아에게 빼앗긴다. 크림 반도는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을 해버렸고 주민투표를 통해서 러시아로 편입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도네츠크를 비롯한 러시아계 다수 지역까지도 독립요구를 하며 시위대가 무장하고 군복차림으로 나서고 있다. 이를 진압한다고 투입된 우크라이나군이 되려 무장 시위대에게 포위되며 무기를 넘겨주고 굴욕적으로 탈탈 털리면서 철수를 하는 상황이다. 물론, 함부로 러시아계 무장 시위대를 건드리다가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2013년 11월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 잠정 중단으로 시작된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과 도피,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등을 겪은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내전 상태와도 같은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촉발한 배경에는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적 갈등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다. 즉, EU 가입을 지지하는 서부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이에 반대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원하는 동부, 남부 우크라이나 국민들간의 고질적인 갈등이다. 그동안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자국의 EU가입에 대한 찬반논쟁이 활발히 전개됐지만, 이처럼 격렬한 양상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아래는 우크라이나 위기의 현재 정황을 적절하게 잘 설명한 만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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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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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뭔가가 보인다.우크라이나가 위험하다!

프랑스의 시각으로 본 우크라이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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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두루미(러시아)와 왼쪽의 황새(EU): "걱정 말아, 친구야! 내가 널 구해줄께!!" (EU 뒤에 있는 백로는 미국이다.)
가운데의 물고기 = '우크라이나'
덤으로 딸려나온 = '유혈 사태'
가운데 밑의 악어: '내전?'

지금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은... 남베트남 : 동유럽리메이크이고 소름이 끼치도록 닮은 점이 많다.

  • 친러/반정부 파와 반러/친정부 세력 양쪽 쌍방 세력에서 병림픽급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 동부에서는 대놓고 반정부 시위(정부를 비난하는 것도 아닌 아예 부정하는)가 횡행.
  • (쌓인게 많았던) 동부 사람들은 정부 지도부 뿐만 아니라 아예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음.
  • 민병대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
  • 시위를 경찰로는 감당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지경.[25]
  • 서구 열강 VS.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놓고 벌이는 속보이는 패권다툼.
  • 국민, 정부, 군대, 공권력, 영토 모든 것이 다 분열, 분열, 분열(...).
  • 물론, 피해와 불이익은 애꿏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고스란히 받음.

공통점이 더 있으면 추가바랍니다.

우크라이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비단 경제위기뿐만이 아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가 잘 보여주듯 EU 가입 추진은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한 대외정책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뿌리깊은 지역 분할구도는 대선, 총선은 물론 대외정책 결정에도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 1654년 제정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이래, 우크라이나는 1917년 10월 혁명 직후 3년을 제외하고 91년 소련 해체 당시까지 사실상 러시아 영토의 일부로 존재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역사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구분되는 2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나라가 됐다. 우크라이나 북서지방은 과거 폴란드, 리투아니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로 현재 종교적으론 로마 교황을 교회 수장으로 인정하지만 정교회(Orthodox) 예식을 따르는 이른바 우니아트 교회의 영향권에 속해 있다. 이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우크라이나인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크라이나 남동지방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러시아와 경제적,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정교회의 영향권에 속한다. 이 때문에 북서지방은 EU 가입을 지지하고, 남동지방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원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특히 이번에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병합한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에 편입된 역사가 비교적 짧고(1954),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58%)를 차지해서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성향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후 EU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을 해 왔지만, 심각한 경제위기와 뿌리깊은 지역 분할구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분열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위기에 직면해 있다. 비록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와 EU가 3월 21일 협력협정의 정치 부문에 서명하고 5월 대선 이후 경제 부문에도 서명하기로 합의했지만, 현재 같은 내부의 고질적인 갈등이 지속되는 한 EU 가입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유럽연합(EU)과의 협상 불발로 지난해 말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야누코비치 대통령 축출과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 동부지역 분리주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국제 사회는 25일(현지시간) 치러지는 조기 대선이 우크라이나 정국 안정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블룸버그통신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5월 25일 열리는 대선 이후 가능한 세가지 시나리오를 25일 내놨다.

  1. 중립적 시나리오: 2차 투표 실시 = 우크라이나 선거법에 따르면 1차 투표에서 한 후보가 50% 이상의 득표율을 얻지 못하면 1, 2위를 기록한 2명의 후보자가 결선 투표를 다시 치러 다수의 득표자가 당선되게 된다. 허나 페트로 포로셴코가 50% 이상의 득표율을 얻어서 이 가능성은 무산.
B. 최상의 경우: 1차 투표로 대선 마무리 = 현재로써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조기 대선의 빠른 마무리다.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벌 기업가 출신 정치인 페트로 포로셴코가 25일 투표 50% 이상의 득표율을 얻으면 우크라이나 대선은 바로 종료된다.

아직까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대선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아직까지는... 포로셴코는 오렌지 혁명을 두고 러시아와 갈등을 빚었던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보다 러시아의 암묵적, 혹은 공식적 인정을 받아낼 가능성이 더 높다. 우크라이나 대선의 빠른 종료와 차기 정부의 출범으로 우크라이나의 정치혼란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수 있다. 과거 경제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포로셴코가 강한 리더십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면 나락으로 떨어진 우크라이나 경제도 회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 듯 했으나...

C. 최악의 시나리오: 내전과 러시아의 침공 = 동부지역이 대선을 거부했고, 소요사태가 일어나더니, 결국은 내전으로 발발했다.

동부지역 분리주의 움직임을 딛고 대선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마무리를 지었지만, 러시아가 겉으로는 대선을 존중한다고 말해도 뒤에서는 다시 접경 지역의 군사훈련을 재기하는 등 뒷통수를 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 가능성은 동부지역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우크라이나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서구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더 높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가즈프롬 등 러시아 국영 기업들 역시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러시아 증시 하락과 루블 급락, 우크라이나 금융시장 붕괴 등 양국 경제에도 잇따른 악재가 예상된다.

러시아가 대선 결과를 인정한다고 밝혔지만, 동부지역 주민들이 중앙정부를 거부했고 분리주의 움직임을 확대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차기 정부는 이들을 끌어안는데 실패했고, 러시아가 자국 주민 보호를 내세워 개입 움직임을 보일 경우 제 2의 크림 반도 사태가 발생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2014년 8월 26일 현재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다. 단 전면침공은 아니고 1,000명 정도가 투입되어 반군에 대한 제한적 지원에 머무는 상황.[26] 한국전쟁 당시 소련의 참전과 비슷하다.기사링크

2014년 말기에 다다르며 러시아는 점점 동부 개입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한 후 러시아군이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철수 중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기사 남부 도시 마리우폴 쪽으로 전선을 늘리고 정부군에게 65%의 중장비 손실을 강요하는 등 잠시 주춤했던 반군 세력이 의외로 잘 싸우고 있는듯. 우크라이나 동부 위기 상황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대해 경제제재로 일관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대응이 미약하고 별 효과가 없다. 원래 제재는 나라가 크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을 상대로는 효과가 매우 미비하다. 그리고 러시아인들 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나라 국민들도 드물다. 러시아의 경제 난황은 사실 세계적 경기 불황으로 인해 러시아 역시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2012년 GDP 증가율이 3.4%로 낮아졌던 러시아는 심지어 2013년엔 GDP 증가율이 1.3%까지 추락했다. 서방 측의 경제제재는 단지 러시아를 조금 더 불편하게 할 뿐.

다만, 서방 측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로 당장 외국자본은 탈출하는데다 시중 은행, 기업들이 달러, 유로화 등의 외화를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해외채무를 갚기 위해 이들이 외화 구하기에 나서면서 루블화 가치가 급락했다. 러시아는 환율방어를 위해 외환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있는 상황. 90년대 말 동남아 및 대한민국1997년 외환 위기와 비슷한 상황. 반면 러시아 전체수출의 65%, 재정수입의 50%를 담당하는 자원산업 쪽은 영 경기가 좋지 않다. 2014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동부위기, 이라크 내전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되려 하락세를 계속하고 있다. 아무래도 경제위기로 서유럽 등지에서 에너지 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데다 이런저런 정치적·경제적 이유[27]OPEC에서도 석유를 크게 감산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예상 수요 대비 생산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셰일층에서 원유를 추출하는 방법이 진일보하면서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이고, 서유럽 역시 러시아의 반복적인 밸브 잠구기에 질려 에너지 수입원 다각화에 나서면서 러시아의 자원수출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 위에 서술된 요소들은 지극히 미국을 비롯한 서방 중심주의적인 주장으로, 러시아 또한 미국에 동조한 유럽에게 농축물과 에너지 맞제제를 가하면서 유럽 (특히 러시아와 근접한 국가들)또한 경제적, 금융적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로 농축물 수출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농부들은 제재에 의해 타격을 받자 유럽연합과 자국 정부들을 상대로 상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고영어 러시아-우크라이나 문제를 놓고 EU가 갈라지고 있으며 (러시아와 맞짱도 불사하자는 강경파: 영국, 발트 3국. 온건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이들은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로 미국이 바라는 식의 대 러시아 제재는 원치 않는다. 제3세력[28]: 체코, 헝가리를 비롯한 동부 유럽들. 거의 모두 러시아에 상당한 경제와 에너지 의존을 하고 있다. 당연히 이들은 미국의 러시아 제재에 반발.) 미국과 엇갈리고 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우크라이나 문제와 가스 협상이 계속 결렬되면 유럽연합의 불만의 화살은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않되고 오히려 제동을 자꾸 거는 미국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이 비디오를 들어보시라.12:20분 부터 그리고 자꾸 셰일 셰일 에너지 수입원 다각화를 외치는데, 거기의 비용은 얼마이며(러시아 가스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시일은 또한 얼마나 걸리나? 그게 하루 아침에 뚝딱 되는가? 그 시일동안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인들은 가스없이 겨울을 날 수 있는가 보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러시아는 미국과 무역 관계가 5%도 않되고, 유럽만이 러시아가 목줄매고 있는게 아니다. 영어를 하시는 분들은 이 링크를 보시라.러시아의 세계적 입지 여하튼간에,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

설령 러시아의 개입이 없어지더라도[29] 이 내전에서 전선이 하나가 더 늘어나고 중장비의 65%를 손실한 우크라이나군(포로셴코 대통령 본인이 직접 언급)이 동부의 반군을 완전히 일소할 수 있을지는 좀 다른 문제지만.

8 외교 관계[편집]

8.1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행보[편집]

1991년 소련 해체로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는 크랍추크, 쿠치마, 유시첸코, 야누코비치로 이어지는 정권 변화에도 EU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우크라이나는 94년 6월 독립국가연합(CIS) 회원국 가운데 최초로 EU와 동반자협력협정(PCA, 1998년 발효)을 체결해 양자협력의 포괄적 기반을 마련하고, 97년 9월 우크라이나-EU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EU 가입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이후 1999년 5월 당시 쿠치마 대통령이 EU 가입을 의미하는 ‘유럽의 길’을 선언했으며 2002년 6월 EU 가입을 최우선적 국정과제로 규정하면서 EU가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법·제도 정비도 본격화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움직임에 러시아는 강력히 반발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슬라브족의 문명적 고향이자,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인 크림반도가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시 CIS 내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큰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할 경우 자국 주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이 추동력을 상실할 수 있어 러시아로선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부채상환 독촉, 가스가격 인상, 잠가라 밸브등의 방식으로 경제적 압력을 가하면서 2004년 11월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러시아와의 경제 통합에 호의적이던 야누코비치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오렌지 혁명’ 이후 EU 가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유시첸코가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우크라이나의 EU행은 더욱 유력한 시나리오가 됐다.

2005년 1월 유시첸코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우크라이나는 EU의 ‘유럽근린정책(ENP)’에 입각해 ‘ENP 행동계획’을 마련했고 이를 통해 EU와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가입 기준 충족을 위한 내부 개혁을 서둘렀다. 2010년 2월 집권한 야누코비치 역시 당초 예상과 달리 균형외교를 선언하면서 EU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해나갔다.

2013년 5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주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그램인 관세동맹에 옵서버로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EU와 탈소비에트 국가의 협력 프로그램인 ‘동부 파트너십’ 차원에서 사실상 자유무역협정(FTA)에 해당하는 협력협정 체결도 계속 추진했다. 그러나 2013년 11월 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를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이러한 결정은 이른바 우크라이나 사태의 시발점이 됐다.

야누코비치 정부가 EU 가입의 분수령이 될 협력협정 체결을 중단한 배경에는 러시아 측 압력과 함께 심각한 경제위기가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경상수지 및 재정수지 적자 확대, 대외채무 누적 등으로 디폴트 위기에 직면해 대외자금 조달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2013년 우크라이나 경제는 2012년(0.2%)에 이어 0%대 저성장에 처해 있었다. 또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8.9%까지 확대됐고, 재정수지 적자가 GDP 대비 4.4%를 기록했으며,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중도 약 200%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EU와의 협력협정 체결에 따른 제도개혁 비용이 2017년까지 연 200억 달러씩 총 16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경기 침체를 겪던 데다 사실상 후진국이나 다름없는 우크라이나를 편입시켜 큰돈을 들일[30]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EU는 단지 14억 달러 지원만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 야누코비치는 2013년 10, 11월 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비공식회담을 갖고 우크라이나-EU 협력협정 체결을 중단하는 대신 150억 달러 차관 지원과 가스가격 인하 약속을 얻어냈다. 결국 경제위기와 러시아의 에너지지원 위협, 그리고 친러파가 EU 가입을 향한 우크라이나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자체의 지정학적인 특성 역시 문제로,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보듯이 우크라이나는 기본적으로 평지 위주라 러시아군의 주특기인 장갑기동군을 동원한 고속타격전에 굉장히 취약하다. 군축으로 인하여 방어 위주로 전력이 개편된 EU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에 극히 좁고 그나마도 절반이 친러국가 벨라루스에 막혀 일부 국경만을 맞대며 심장부와 다소 떨어져 있는 발트 3국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심장부를 남부에서 직접 노릴 수 있는 위치라 러시아가 결사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부담이다.

8.2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은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연합 국가들과 수교를 통해서 우크라이나를 승인하였으며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도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를 승인하여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1998년 공관을 철수하였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지만 서구권만큼이나 동양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관광을 갔을 때 중국인으로 오인받으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하니 조심하도록 하자.

9 문화[편집]

9.1 스포츠[편집]

축구에서는 변방국으로 인식되었으나 자국 명문구단 디나모 키예프샤흐타르 도네츠크의 국제무대 선전과 안드리 셰브첸코라는 국가적 영웅이 등장한 이후, 2006 독일 월드컵 8강 진출 성과를 이뤄냈다. 국대에 대해 자세한 것은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우크라이나의 최고 스포츠스타는 복싱 헤비급 챔피언 비탈리 클리츠코&블라디미르 클리츠코 형제이다. 형 비탈리는 1999년 처음으로 WBO챔피언에 오른 뒤 통산 45승 2패 41KO를 기록하고 헤비급을 천하통일한 뒤 2012년 은퇴했다. 그후 동생 블라디미르는 헤비급 통산 2위의 타이틀 보유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WBA,WBO,IBF 헤비급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센 형제 중 하나이다. 형 비탈리는 복싱 은퇴후 현 야당인 우크라이나 개혁민주동맹당의 당수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통령 출마를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지지를 얻어 2014년 6월 키에프 시장에 당선되었다.

펜싱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 은퇴한 남자 플뢰레의 세르히 홀루비츠키는 김영호와의 1997년 세계선수권 결승전에서 연장혈투 끝에 금메달을 거미쥐었다. 3년 후 김영호와 홀루비츠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8강에서 만났는데, 홀루비츠키는 이 경기에서 5대 15로 대패한 뒤 그대로 은퇴하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31] 여자 사브르 단체전의 초대 금메달리스트가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당시 올가 카를란[32]가 마지막 바우트에서 맹활약을 펼친 것에 힘입어 홈팀인 중국을 1점차로 잡고 우승하였다. 바로 앞선 준결승전에서는 매리얼 재거니스를 필두로 사브르 개인전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휩쓴 당시 세계랭킹 1위 미국을 6점차로 꺾었고, 더 전으로 돌아가 8강에서는 현재 세계랭킹 1위 (당시 세계랭킹 4위) 에 군림하는 러시아를 꺾었다. 이후 카를란은 크게 성장하였고, 여자 사브르 내에서 가장 꾸준한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여자 에페의 야나 솀야키나는 런던 올림픽 여자 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독일의 브리타 하이데만을 연장전에 꺾고 우승하였다.

그 밖에 체스를 무진장 잘하는 나라다. 현재 러시아에 이어서 세계 2위를 하고있다. 우리나라에 꼴랑 하나있는 그랜드 마스터를 74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종합격투기에서는 90년대 무규칙격투를 주름잡았던 이고르 보브찬친이 대표적이다. 격투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그 동생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의 프로 축구단까지 자국 리그에 병합했다. 러시아 축구협회는 8월 1일 성명을 통해 크림반도에 있는 SKChF 세바스토폴, 젬추지나 얄타, 타프리아 심페로폴 등 3개 구단을 러시아 프로축구 리그에 편입시켰다고 밝혔다.

이들 우크라이나 클럽은 올 시즌 개막과 함께 러시아 3부 리그에서 활동하게 된다. 러시아는 올해 2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병합을 선언하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축구협회는 러시아의 축구 클럽 병합에 강하게 반발했다. 협회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월권행위를 저질렀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축구에서 정치가 배제되기를 원한다."며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의 제재를 촉구했다.

FIFA는 축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축구 경기나 행정에 대한 정치권력의 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 원칙을 어기는 회원국에 자격정지나 제명과 같은 제재를 가하기도 해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러시아는 2018년 월드컵 본선 때 크림 반도에 참가국 베이스 캠프를 차리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9.2 전자오락[편집]

e스포츠 실력이 우수한 나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으레 블리자드 행사에서 스타크래프트에 출전하면 한국선수 상대로 꼭 한판정도는 이기는 스타 강국중에 하나이기도 하며, 그 외 워크래프트 3, 최근에는 스타크래프트 2까지 유럽 내에서는 우수한 게임 강국 중에 하나이다. 동구권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크래프트 2 프로게이머 DIMAGA가 우크라이나 출신. 도타 2 강호, 2014 월드 오브 탱크 그랜드 파이널 우승팀인 Natus Vincere도 우크라이나 팀이다.

동구권 한정으로 폴아웃3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FPSRPG 스토커 시리즈가 이 나라에서 나온 물건이다.[33] 가끔씩 러시아에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을 아는 사람(특히 우크라이나 사람)이 그런 소리 하는걸 보면 폭풍같이 깐다.

10 우크라이나 국적, 출신 캐릭터[편집]

※ 해당국 작품 제외.

11 우크라이나 출신 인물[편집]

러시아 예술가로 알려진 인물들이 알고 보면 우크라이나 태생인 경우가 꽤 많다. 문학가 니콜라이 고골과 음악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그런 경우. 네오 클래시컬 메탈 장르에서 유명한 키보디스트인 비탈리 쿠프리(Vitalij Kuprij)도 여기 태생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그레고로비치 길렐스(오데사 출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스뱌토슬라브 리크테르/리히테르), 마리아 그린버그 등의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이 사실은 우크라이나 출신. 특히 유대계가 많다.

언급된 인물들의 상당수가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1. 영어로는 유크레인(/juːˈkreɪn/)이라고 읽는다.
  2. http://www.0404.go.kr/country/mapView.do?menuNo=1050100&country_code=169
  3. 2014년 인구도 크림 반도가 나가면서 약 200만명이 줄어들게 되었다.
  4. 경제성장이 계속되면서 1인당 GDP도 상승중. 하지만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이다. 특히 1인당 GDP는 인구 감소의 덕을 보는 측면도 있다.
  5. 투르크는 이슬람 세력이었고, 종교적으로 동부우크라이나인들이 믿던 정교회와 상극이라 이곳 사람들은 러시아의 진주를 환영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동서갈등은 바로 이런 배경이 있다.
  6. 서남부 5주는 제외. 여기는 오스트리아(이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차지했다.
  7. 적백내전 당시인 1921년~1922년에도 이미 1차례 대기근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대기근의 원인과 결과 논란은 항목 참고.
  8. 이런 독일의 우크라이나 천시는 독소전 패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도 지적받는다.
  9. 폴란드식 이름으로는 르부프Lwów. 공작의 아들 '레오(사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곳이라서 라틴어로는 레오폴리스라고 했던 도시다. 안 그래도 독일어로 뢰베Löwe가 사자인데, 정작 독일에서는 렘베르크(Lemberg)라고 한다.
  10. 반파, 반노 성향을 가진 극우 정당 자유당의 지지도가 높은데, 재작년에 폴란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청년한테 계란을 맞았다. 폴란드 영토였는데 왜 폴란드 반대 성향이 강하냐면... 원해서 지배받은 건 아니었으니까.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인이 전체 인구의 88.1%로 압도적으로 많고, 폴란드계는 타 지역보다 많지만 그게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 자체가 원래 가장 우크라이나에 동화한 집단이다.
  11. 옛 이름은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의 이름을 딴 스타니슬라보프이며, 1962년에 작가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12. 몰도바 공국은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고, 이후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초기 독립 상태에서 이 바다 지역을 나중에 차지한 셈이라 반드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애초에 민족 구성을 따지더라도 몰도바는 루마니아의 일부였다가 소련이 병합했으니(...)
  13. 크림 반도는 2014년에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우크라이나에서 벗어난다.
  14. 단, 크림 반도와 극동부 일부 지방을 빼면 완전히 똑 떼어서 다르다고 못한다. 지역적으로 크림 반도는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이고 나머지 지역은 그래도 우크라이나계가 다수다.(하르코프의 경우 우크라니나계 48% 대 러시아계 40%로 반반이다) 물론 러시아어가 더 우세한 지역들은 극동부에도 있지만, 그건 우크라이나계 가운데 러시아어 사용 인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인기세를 탄 기갑갤의 모 정리글을 포함해) 주장하는 "동부와 서부는 전혀 다른 민족이고 동부는 러시아에 흡수를 바란다"란 주장은 크림 반도만의 이야기이니 틀렸다. 친러,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15. 몽타주 기법을 처음 쓴 장면으로 영화학도들은 반드시 봐야 하는 장면이다. 워낙 유명해진 나머지 아예 이름이 포템킨 계단(Потьомкінські сходи)으로 붙여졌다.
  16. 정교회 가운데 교황과 일치하여 가톨릭으로 흡수된 경우.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서부에 많다.
  17. 독일군의 남부집단군을 견제하기 위해 키에프 군관구는 소련군 군구에서도 손꼽히는 중무장 군구였다.
  18. 영화 로드 오브 워의 모티브가 되었다. 주인공 유리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우크라이나 방어군 장교인 삼촌한테 뇌물먹이고 AK-47 4만정을 뽀리는걸로 시작해 탱크, 장갑차에 이어 공격헬기까지 빼돌린다.
  19. 네이버 뉴스 네티즌들의 돌직구들이 백미: "국민도 갈라지고, 의회도 갈라지고, 군인도 갈라지고, 경찰도 갈라지고, 이렇게 분열된 상태에서 러시아와 싸움되겠냐?", "지들끼리 알아서 자멸하네 러시아는 앉아서 거져먹기 ㅋㅋㅋ", "우크라이나안에는 두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등등... 근데 네이버 뉴스 댓글러들이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20. 왜 이리되었냐면 대선 결선에 올라온 야당 후보가 공산당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심한 서부에서 쿠치마를 찍은 것.
  21. 다만 현재처럼 동부와 서부의 정치성향이 극과 극으로 까지 갈리지는 않았다. 1991년 대선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동서구도가 무의미 했던 대선이다.(정확하게는 서부에서 바체슬라프 후보가 서부 3개주만 1등을 달렸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크라우추크가 압승을 거두어서 동서 구도가 별의미가 없었던 것.)
  22. 쿠치마 집권기만 해도 반정부성 기사를 싣던 어느 기자가 쥐도새도 모르게 머리가 날아간 채로 키예프에서 발견된 적도 있었다.
  23. 이전 러시아어 표기법을 따라 유셴코로도 표기가 되는데 우크라이나어에서는 Щ가 원음인 shch로 그대로 발음되기때문에 유시첸코에 가깝다.
  24. 댓글란의 반응들이 예술: "우리국회 수출 1호 인가?", "한류가 우크라이나 까지 갔나보다...", "국회의원 4강 토너먼트 우크라이나: 비탈리 클리츠코, 크로아티아: 크로캅, 필리핀: 파퀴아오, 한국: 문대성", "훗! 우리나라의 國K-1을 비교하면 멀었구나 우리나라는 슬래시해머도 등장했지", "그래도 우리 국의원들 보단 펀치력에서 딸릴걸? 특히 우리 국의원들 때린데 또 때리는건 예술의 경지까지 왔는데" 등등... 러시아의 알렉산더 카렐린까지오면? 답이 없어요.
  25. 그 야누코비치도 시위대에 군을 투입하진 않았다. 벌써 신정부군과 그 추종 세력들이 하는 진상짓들을 보고 있는 러시아인들, 동부 시민들 그리고 소수의 (진보적인)서방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것들(신정부)이 야누코비치와 뭐가 다르지?" 하는 중.
  26. 서방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지 않는 선 내에서 계속 공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27. 석유값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떠오르는 원유 주요 소비국인 중국을 고객으로서 잡아두기 위해 원유 수출량을 줄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28. 본래는 반러 강경파였으나 경제적 현실과 다가오는 겨울, 그리고 의도치 않았던 계산 이상의 우크라이나 피해등으로 인해 온건파로 돌아섰다.
  29. 그럴 가능성은 없다. 러시아의 시점은 우크라이나까지 궁극적으로 NATO로 가입을 하게 할 수 없기 때문.
  30.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가입은 경제사정이 좋던 2007년에 이뤄졌는데도 EU 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뒤로 비슷하거나 그 이하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를 가입시키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하다못해 크로아티아도 국민소득이 꽤나 높은 축에 들어간다.
  31. 개인전은 전 대회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때 처음 등장하였다.
  32. 런던 올림픽 여자 사브르 개인전 시상식에서 김지연의 볼에 키스해 화제가 된 인물
  33. GSC Game World가 우크라이나 회사다.
  34. 국적은 러시아지만 출생지는 키예프로 되어 있다.(당시 러시아에 합병된 상태라서 그런 듯)
  35. 정체는 먼 미래에서 온 렉스 루터의 후손이지만 자란곳은 우크라이나이다.
  36.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이 이 게임의 모델
  37. 출생지는 우크라이나이지만 오스만 제국의 하렘으로 팔려왔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38. 출생은 우크라이나이지만 활동은 러시아에서 했으며 러시아의 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골 자신은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러시아어를 외국어로 생각했고 그의 작품들 중에는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하는것들도 많다. 비이나 타라스 불바에서는 강한 우크라이나의 정취가 난다.
  39. 출생은 우크라이나이지만 선대는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해 온 러시아인이다.
  40. 독일계 유대인이다.
  41. '루슬라나'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슈퍼스타 가수. 생모가 러시아인이다.
  42. 아버지는 세르비아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
  43. 부모 모두 유대계인 유대인이다.
  44. 퀀텀 오브 솔러스의 본드걸 카밀, 오블리비언(영화)의 줄리아 역으로 알려져있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
  45.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천하의 개쌍놈이다.
  46. 현대건설 배구단의 외국인 선수 아버지는 러시아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다. 국적은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이중국적
  47. 쉴레이만 대제의 황후.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에서 오스만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생애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무흐테솀 유즈이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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