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 부르주[1]
프랑스어 : Bourgeois, Bourgeoisie[2]
에스페란토 : Burĝo

1 개요[편집]

사회/경제/정치계 입지를 가진, 흔히 상류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

2 상세[편집]

17세기에 등장한 용어. 당시 유럽권과 동북아시아 3국(중국, 한국, 일본)의 중국권은 사소한 것부터 그 개념이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거주지의 일종인 도 예외가 아니였다. 동양권의 성이 '대형 도시'적인 의미가 강했다면, 서양권의 성은 '지역 핵심 계층들의 거주지겸 방어용 요새 '적인 의미가 강했었다.

동양권에서도 꼭 장성, 산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이나 조선의 '읍성', 일본은 성에 부속된 성하촌락 등이 이런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성이 훨씬 많다. 동양에서도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안정된 계층이었다.

이러한 것은 두 지역간의 성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하는데, 동양권에서의 성(城)은 '주요 요충지 방어용 요새(중국의 만리장성, 고려의 천리장성 등등)'로서의 의미가 강했던 반면, 서양권에서의 성(Castle)은 레이드 오는 세력들의 공격을 막는 요새인 동시에'지역 중심지'로서의 의미가 강했던 것이 결정적이 차이였다.

핵심계층이 거주하는 내성과 방벽인 외성 사이에는 도시민이 거주하는 공간이 있엇는데, 이를 bourg라 하며. 여기 거주하는 상공인 계층을 bourgeoisie라 불렀다. 물론 이때의 부르주아지는 정확히 말한다면 성민이라 불러야한다. 현재 사회에서 가리키는 시민의 기원은 이 이후 성이 커져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 즉 자연 인구증가, 도피 농노들의 후손,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 도시 근교에서 사는 사람등을 합쳐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에서 통용되는 부르주아지도 이렇게 발전한 도시에서 귀족이 아닌 도시민가운데 상류층들을 뜻하는 것이다.

3 왜 성벽이 부유층의 상징인가?[편집]

그런데 왜 성벽이 부유층의 상징이 되었는가?

치안 문제가 가장 크다. 현대 이전까지 '야외'라는 공간 자체가 맹수, 도적 때문에 그리 안전하지 않았고, '성벽'은 안정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구조물이었다. 성벽으로 일정 지역을 감싸서 출입 자체를 통제하면 치안이 상당히 안정되는 성과를 올릴 수 있다. 성벽은 현대의 '그린존'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전반적으로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성벽 내부라고 해도 현대 도시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안전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성벽도 뛰어넘어왔다는 늑대, 호랑이 같은 기록도 있고, 성벽 내부도 분란이 있었다. 하지만 성벽 내부가 상대적으로 성벽 외부보다는 훨씬 안정적이고 통제된 거주 공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농민등의 1차 산업 종사자들은 생업 관계상 어쩔 수 없이 농지에 가까운 농촌에 거주해야 하고, 성벽 내부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이들은 제한적으로 성시를 방문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상공인들은 성벽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유리했다. 물론 지배층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잃을 것이 많은' 부유한 사람들은 치안이 좀 더 잘 확보된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지배층들은 의도적으로 성벽 내부를 자신을 추종하는 '귀족' 세력으로 채우기도 했다.

들어오는 것도 문제지만 계속 살기 위해 내야 했던 세금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성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있다보니 자연히 집세 역시 상상할 수 없을만큼 늘어났고, 때문에 좁디 좁은 건물들이 많았다고. 부르주아=돈많은 자라는 공식이 된 것도 이 세금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자만 성에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당시의 성벽 도시란, 보안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대형 고급 주상복합아파트 같은 것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4 경제 계층[편집]

부르주아의 특징이라면 '경제권은 있지만 지배권은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경제권과 지배권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으며 순수 혈연으로 유지되는 반면 부르주아는 경제권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어도 정치적 지배권은 실질적으로 전무하지만[3] 대신 굳이 혈연뿐만이 아니라 실력으로도 얼마든지 부르주아 직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 그들의 특징이다. 즉 일반 서민이라도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도달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로 내려갈 수도 있는 사회적 위치인 셈. 원래의 부르주아 계급은 조선시대의 중인 내지 하위급 사족 같은 위치였다고 보면 된다.[4]

5 사회 계급으로 발달[편집]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유럽 사회가 공화정치 민주주의로 탈바꿈하자 부르주아는 드디어 귀족의 뒤를 이은 막강한 사회 직위로 거듭난다. 기존의 정치권을 틀어쥐던 귀족층이 대대적으로 무너졌으니, 그 다음으로 높은 직위인 부르주아층이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심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말고도 시민계급전체가 나섰고 부르주아들도 자신들을 시민이라 지칭했기에 형식적으로는 만인이 평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기왕이면 경제력까지 쥐고 있는 부르주아들이 정치 권력을 틀어쥐는덴 아무래도 좀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다.

근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귀족이 깡그리 쓸려나간 것은 프랑스 만의 이야기(…)에 가까운데 유럽에만 해도 독일, 영국 등 다른 국가는 상대적으로 귀족 계급이 적어도 근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보전되었기 때문. 다만 다른 지역에서도 젠트리 등 프랑스의 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상공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기는 했다.

이리하여 부르주아는 단순히 '실력있는 일반인'에서 '귀족 이름만 없는 귀족급 일반인'이란 사회 계급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부르주아'하면 높으신 분들이 되어버렸다.

간혹 '귀족 = 부르주아'라고 하는 경우도 적잖게 존재하나('귀족들이 즐겨입은 부르주아 패션'이라든지...), 엄밀히 말해서 부르주아는 귀족이 아니다. 귀족은 말 그대로 혈통으로 타고난 높으신 분들이고, 부르주아는 혈통이 아니기 때문. 과거 진짜 귀족들의 유령이 '귀족 = 부르주아'란 말을 들으면 혀를 찰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양반들이 즐겨입은 상인 패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엄밀히 말하면 '부르주아들이 귀족 문화를 흉내내는 경향'이 강했다.

여하튼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법률적으로 일단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별 계층'은 절대로 성립되지 못하며, 따라서 부르주아건 아니건 모든 국민의 법률적 직위는 평등하다. 따라서 부르주아 또한 결국은 '일반인' 신분이다.

부르주아층의 도약으로 혈통이 아닌 능력이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따라서 높은 능력 수준을 가진 부르주아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다른 말로 '부르주아 경제'라고도 부른다.

6 부르주아 비판[편집]

이러한 부르주아 중심의 사회적 시스템이 생기자 '기껏 귀족 하나 몰아냈더니 또 다른 귀족들이 나타나서 거들먹거린다'며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반(反)부르주아 중심 사상을 외친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여러 대립성 이념들이 탄생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게, 부르주아층의 사회 주도 초기엔 이렇다 할 제제장치가 없고 아무리 세상이 뒤엎어졌다해도 빈민층들에게까지 투표권이 주어지지않았기 때문에 [5] 부르주아층이 사실상 귀족이나 다름없는 막강한 권한을 누렸었기 때문이다.지금은 당연시 되는 여성투표권도 당시에는 급진적인 담론을 취급받을정도였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일.

재미있는건,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이 정작 그 부르주아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혁명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체 게바라도 지역 유지 출신이였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생활 수준이 높아서 그만큼 교육 수준도 높은 경우가 많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자면 권력은 높은 계층내에서만 돌고 돈다는 이야기. 낮은 계층의 경우 주원장같은 예외케이스를 제외하면 봉기해봤자 만적이나 와트테일러처럼 갈려나가고 저런 주장을 해도 그 사람과 주장에 권위가 없어 사람이 잘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과거 부르주아급 사회 계층이 존재하였었다. 이른바 지주 계급이라 하여 사실상 부르주아와 동일한 사회 계층이였다. 한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왕족, 양반층 등의 특별 계급이 철폐되었고, 또 광복을 거치면서 다시 새로운 특별 계급이였던 일본인/친일파 등의 특별 계급이 다시 한번 철폐되고 나니 한 때엔 지주층이 사회 주도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해방기즈음을 무대로 그린 작품에서 서민 주인공 vs 최종보스 지주 구도의 작품들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이나 북한이나 각자의 이유로 지주 계급이 말라죽으면서[6]산업혁명 당시의 부르주아층만큼 오랜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사실 당사자들에겐 더할나위없는 비극이긴 했지만, 이후 양국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지주층의 소멸은 대한민국과 북한 양국의 발전 정책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지주층이 사라진 덕에 마음놓고 경제개발을 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국가적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7]

현재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부르주아와 거리가 있거나, 최소한 그렇게 불리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작은 아이러니.

  1. 가끔 '브루주아' 혹은 '브르주아', 혹은 '부루주아', '부르조아', 아니면 보르조이 등의 표기가 보이지만, 사전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표기법은 '부르주아'이다.
  2. Bourgeois(형용사), Bourgeoisie(명사), Petite Bourgeoisie는 중산층을 의미한다.
  3.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딜가나 그렇지만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계 인사를 포섭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계급제는 경국대전상의 원칙적으로는 양민과 양민이 아닌 천민으로만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사회적으로는 계급을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는 반상제가 통용되었는데, 원칙적으로는 상민도 과거시험의 문과(文科)나 무과(武科)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과는 일반 농민들이 사실상 준비 및 합격이 불가능했고, 무과도 유교 경전을 공부해야 하므로 진입장벽이 높았던 탓에, 일반인들은 과거시험을 잡과(雜科)로 응시해서 중인이 되는 편을 많이 선호했다. 중인은 양반과 달리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불가능하지만 전문적인 지식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로 중앙의 양반가에 연줄을 대거나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5. 실제 영국에서 빈민층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건 1885년의 일이며, 프랑스의 경우에는 1848년 혁명으로 왕정자체가 폐지되고 나서야얼마 뒤에 황제가 나오게 되지만 빈민층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6. 북한은 당연히 이런 부르주아를 혐오하는 공산주의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지주층들을 적극적으로 때려잡았고, 대한민국은 국초에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으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고 이후 국토 전체가 전장이 되면서 가문 내력이나 토지 이해관계등이 완전히 뒤집어 엎어져서 지주층이 싸그리 잊혀졌다.
  7.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 역시 대외적으로는 노예제 폐지 문제로 발생한 내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남부의 지주들이 당대 미국 정부의 공업화 집중 육성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것을 우려해 정부를 보이콧해서 생긴 것이다. 노예제는 남부의 지주들이 반발한 정부의 정책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다. 아무리 토지재분배를 실시했더라도 전통 지주층이 나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면 대한민국도 저런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저항을 겪을 가능성이 높았고, 미국은 이것 외에도 국초에 세금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런 시기를 보냈지만 이렇게 해도 미국에 영향력을 미칠 강대국이 주변에 없다보니 내전 뒷수습을 잘 하고 잘 살아남았지만 한국의 경우 경제발전에 큰 차질이 생겨 지금수준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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