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 Vietnam War
베트남어 : Chiến tranh Việt Nam

Phan Thi Kim Phuc (1972).jpg

사진은 1972년 베트남 전쟁 때 촬영된 소녀의 절규. 네이팜탄 공습 때문에 소녀가 불이 옮겨 붙은 옷을 모두 벗고 울부짖으며 달리고 있다.[1]

1 개요[편집]

1956년~1975년까지(미군 철수 시점까지만 치면 1973년)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산하의 무장단체를 이르는 말인데,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와는 다른 조직으로서 기존 남베트남의 친미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통일시키는것이 목표였다. 참고로,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베트민(Viet minh)과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다.

베트남전의 배경은 길게는 19세기부터, 짧게는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은 사실 상당히 긴 시기동안 발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남베트남에 첫 원조를 시작하고부터 베트남전이 발발하기 전까진 거의 10여년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우리가 미국 쳐들어가서 전쟁 일으켰냐면서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베트남 가서 사귄 친구들이나 관광가이드들이 왜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느냐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보인 경우가 꽤 있다. 어느 이는 미국인들도 여럿 있던 관광단에서 베트남인끼리 싸우는 전쟁에 통킹만 조작으로 멋대로 들어와 전쟁에 끼어든 미국은 뭐냐고 비웃듯이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미국인 관광객들은 입다물고 이런 비난을 애써 모른 척 했다고. 그러나 걸프전(Gulf War)이나 이라크 전쟁(Iraq War), 남오세티야 전쟁(South Ossetia War), 그리고 우리나라 6.25 전쟁을 영어로 한국전쟁(Korea War)이라고 부르듯이 지명에서 명칭을 따오는 용법도 흔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게 틀린 건 아니다.

본 페이지명인 베트남 전쟁은 공식적으로 볼 때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며, 1차는 프랑스, 2차는 미국과 연합국, 3차는 중국과의 전쟁이다. 이 문서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배경에서, 2차인 베트남 전쟁을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얻을 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해서 The Quagmire라는 약칭으로 부른다[2].

'출구 전략(Exit Strategy)'도 베트남 전쟁에서 나온 말이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도, 지속하기도 애매해진 미국이 굴욕적이지 않으면서도 별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고 빠져 나오기 위해 찾던 전략을 출구 전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1.1 배경[편집]

1.1.1 프랑스 식민기와 2차 대전[편집]

19세기 이래로 베트남 지역은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인도차이나'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 통치와 지배는 현지인들에게는 혹독하기만 하고 주는 것은 거의 없이 착취만 하는 식이라 불만이 상당했는데, 프랑스는 독립운동 세력들을 역시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반감이 더욱 쌓여만 갔다.(자세한 내용은 베트남/역사 항목 참조.)

1930년에 있었던 민족주의 세력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기울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프랑스 본토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온 호치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 본토가 독일군에게 나가리되자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일본군과 비시 정부가 손을 잡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된다.

막장 둘이 만나 막장 오브 막장이 되자 공산세력은 민족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일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는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월맹(베트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한테 지원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일본은 패전이 가까워지자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합친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1945년 3월 11일 ~ 1945년 8월 23일)을 성립, 비시 정부와 자유 프랑스 모두의 뒤통수를 치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으나 이는 베트남인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함께 베트남 제국도 무너지며 베트남은 무주공산이 된다.

이후 호찌민은 미군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자신들의 독립을 미국 정부가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미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베트민에게 군사적 지원만 한 것이었고[3],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은 유럽에서의 공산권 국가와의 대치상황으로 유럽의 세력구도를 재편성해야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프랑스가 필요했었고 프랑스가 다시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였다. 드골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비시 정부 협력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며 독려했고 프랑스의 깃발 아래 돌아온 것은 바로 과거의 압제자들이었다.

1.1.2 2차 대전 이후[편집]

일본군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항복을 하자 이 지역에는 영국군중화민국의 군대가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는데,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각각 남쪽과 북쪽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북쪽의 경우 중화민국군은 곧 자국 영토 내의 공산세력과 싸우러 가버려 사실상 공백지역이 돼버리는 바람에 무장해제된 일본군 장비를 넘겨받은 베트민이 북쪽을 장악하여 호찌민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월맹)을 세운다.

베트민은 전쟁 시작과 함께 공산주의 세력이 독립운동 중에 협력했던 민족주의자, 불교도 세력을 분열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공직에서 추방하는 등 숙청작업을 단행한다. 그리하여 베트남노동당의 일당독재체재를 확립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남부의 영국군은 이 지역에 선거를 통한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자주 했지만 프랑스 영토였던지라, 결국 프랑스에 돌려줘버리고 돌아가버린다. 사실 영국은 인도버마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훈수 둘 처지도 못 되었으며 병력 부족으로 비시 잔당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치안 유지에 동원한 탓에 깽판치던 국민당군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

이런 영국군의 정책은 프랑스가 다시 한 번 베트남을 식민지 영향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는데, 영국은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주변의 인도나 버마의 영국 영향력을 줄일수 있다 판단, 베트민과 협상을 하지않고 계엄령을 선포하는등,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책을 썼다. 이로 인해 영향력 있던 베트민과 협상 한번 하지않고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식민지가 될 것이라 착각한다.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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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최초에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주는 듯 하였으나, 이내 약속을 깨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 항구에 대한 프랑스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최소한 6,000명의 베트남 시민이 사망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참고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1950년에야 소련으로부터 정부로서 인정을 받아 이 시점에서도 공식문서에는 베트민으로 취급된다.

최초 베트민은 프랑스와 협상을 하려 했고 예비 협정까지 성사되었으나 "프랑스 주권을 재확립하라."는 샤를 드 골의 명령을 받고 있던 프랑스군은 협정을 깨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프랑스군의 함포 사격으로 하이퐁 시에서 6,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자, 호찌민은 무장 투쟁을 선언하고 프랑스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다. 1946년 12월 19일,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다.

개전 직후, 흔히 뒷이름을 따서 "잡" 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령관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반대로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에서도 독립 압력이 가중되면서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전후 재건에도 사람이 부족한데 애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몰거냐"는 여론의 악화, 미국, 영국등의 외교적 압력으로 서서히 베트남에서의 우위를 잃어간다.

1951년,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전면 공세를 시작한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베트민은 하노이 입성에 실패하고 도리어 후퇴하게 되나 이미 전세는 베트민 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프랑스는 20만명의 월남군이 거의 쓸모가 없어 18만의 프랑스군만으로 전쟁을 해야 했다. 반면 초반에는 어리버리하기까지 했던 베트민군은 전투를 통해 순식간에 정예로 탈바꿈하였다. 거기다 프랑스군은 여기저기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미국의 전비 지원 삭감에 따른 재정부담이 가중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8만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지경에 이르른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패배하게 되고 위신을 있는대로 깎아먹은 채로 철수하게 된다.

2.1 1950~60년대[편집]

2.1.1 남베트남의 대혼란[편집]

그리고 이 정부를 공격해 들어가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게 이번엔 미국이 끼어들었다. 미국은 어찌됐든 이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4], 남베트남을 보호하는데 적극 나서게 된다(그리고 이 예견은 도리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 정책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나중에 아무래도 그때 우리가 좀 미친 것 같았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겁니다라고 회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5].

덧붙여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찌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6]. 호찌민은 일찍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황제가 경찰권을 폭력단에게 공식적으로 팔아넘겼다고 할 정도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정권이었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폭력단과 군벌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80만에 달하는 피난민의 재정착을 완수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농업 국가 주제에 비료수입에 200만 달러를 쓰면서 양담배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막장을 달렸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말그대로 "신악(新惡)이 구악(舊惡) 뺨친다"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온다.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 와중에 남베트남에서는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반부패 운동 조직은 공산당 및 좌파들이 대거 침투하여, 시작부터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서의 색깔이 농후했다는 것이 문제였다.[7]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일부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 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아무나 이겨라(...) 상황이 되었다.

물론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테러와 암살이 행해졌다.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에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관변단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병림픽양상을 띄게 된다. 이쯤 되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라 좀 조용하게 해달라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사이공의 대학생들도 초기에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다가 점점 나라가 막장으로 흐르자 그냥 나라를 버린다. 워낙 나라가 개판이었기 때문에...사실상 남베트남 내부의 부패가 숙주가 되어 좌파의 확산을 불렀고, 여기에 이념적 유혈갈등으로 병림픽이 벌어진 셈이다.

온 나라가 불교도, 가톨릭교도,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극좌/극우파 등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불교도들의 반정부 시위가 극심했는데[8], 지엠 정권의 공공연한 탄압으로 불교는 남베트남 정권 존립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교도 시위를 경찰로는 감당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지경에 이르는데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탓이라는 헛소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유명한 승려인 틱광둑소신공양 사건이 일어났다[9]. 결국에는 군부가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거론하는 상황까지 이르른다. 여기에 한술 더떠 대통령 영부인 역할을 하던 지엠의 제수(응오딘 누의 아내) "마담 누" 쩐레수언이 세기에 남을 대 병크를 터뜨리니, 분신자살을 두고 "중놈들이 한게 뭐 있나요? 기껏해야 자기네 하나를 바베큐로 만든게 고작이죠."라고 지껄이더니 "Let them burn and we shall clap our hands(불타게 놔두고 박수나 칩시다)"라는 망언[10]을 하여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한국말로는 "중놈 몇 명 죽어서 뭐 어떻다고요."로 받아들여도 되는 발언. 이건 뭐 통구이 드립을 영부인급 인물이 공중파로 전세계에 떠들어댄거니... 불교를 국교로 삼다시피하던 베트남 사람들은 당연히도 이 말을 듣자 분기탱천하게 된다.

분신공양 사건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 하에 쿠데타가 발발, 지엠은 동생과 함께 가톨릭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 사살당한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도 지엠의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해외 추방으로 의견을 모아 지시를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사살당한 뒤였다. 이에 어쩔줄 몰라하던 군부는 미국에 지엠이 자살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쩐레수언은 겨우 달아나서 프랑스로 망명했고 48년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병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조국에서 죽게해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간청했지만 베트남 정부는 싸늘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1막에 불과했다. 지연, 학연, 종교와 미국과의 연줄로 분열되거나 또는 난마처럼 얽힌 남베트남 군부는 갑자기 손에 떨어진 권력에 어쩔줄 몰라 했으며 지엠정권 추종자를 모조리 축출한 정치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인들의 야욕에 의해 쿠데타가 두 자리수나 터지는 막장 사태의 수렁에 빠진다. 북베트남군에 항복하는 하루 전날까지 쿠데타가 일어날 지경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일부 종교인들은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와중에 응웬 까오 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한국의 해방정국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단 지도부 자체가 국가 정통성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버렸고, 쿠데타와 부패가 횡행하고, 우익좌익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대놓고 반정부(국가를 비판하는 것도 아닌 아예 부정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는데 정부는 손놓고 있고, 간첩과 게릴라(빨치산)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이걸 한국의 정치상황에 빗대 비판하는 자체가 한국에 대한 모독일 지경.

2.1.2 북베트남의 적화 정책[편집]

한편, 북베트남은 달랐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화국 성립 직후 군사회의에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베트남을 통일한다"라고 결정한다. 이미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추종세력과 무기를 은닉해두었고 COSVN(남베트남 해방사령부)를 조직하여 후일 호찌민의 후계자가 되는 레 두안이 그 수장이 된다.

휴전선 형성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인민재판을 빙자한 대규모 숙청이 단행, 반대자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리고 사실상의 전시체제 선언인 1953년 농업 강령을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집단농장화를 무리하게 추진,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 1956년 말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게안성(省)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성을 거의 장악했다.)가 휴전선에서 동원된 정규군 사단에게 무너지며 일단락된다.

결국 이 2차 토지개혁 기간중 학살 된 농민수는 10만여명으로 추정되며[11] 이 때문에 소련, 중국같은 공산주의 대국들은 호찌민의 리더쉽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나 다행인지 풍년이 계속되었고 경제원조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체제와 경제 모두 안정권에 들어간다. 다만, 공산주의적 농업 방식은 이러한 막장 결과를 안겨준다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지엠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명의 군세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군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되어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명의 정부군이 200여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데꿀멍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된다.

3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편집]

3.1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개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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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와중에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은 이 사건에 없던 사실을 끼워넣고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시작한다. 미 해군 구축함이 공격받은건 사실이나, 날조된 사건이 덧붙여져 크게 부풀려졌다. 더구나 이 과정도 웃기지도 않았는데, 이 사건을 들은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즉시 북폭을 지시했다. 즉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라는 것. 이 때가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의회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통고도 없이 벌인 행동이었다. 한순간에 직접 전쟁의 늪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12].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 1964년 8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 항공대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의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북베트남군은 대공망을 강화하는 것으로 맞섰고, 조종기술이 빈약했던 미공군은 이 단계에서 이미 2기가 격추되면서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게 된다. 그리고 북폭 실시 2일후에 미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된다. 선조치 후보고?. 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해 11월 1일에는 미군 기지가 베트콩에게 기습을 받아 B-57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다. 당연히 다시 미국의 보복이 있었는데, 바로 배럴 롤 작전.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치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물론 당연히 다시 보복이 있어서 12월 24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미군 장교 막사가 폭파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듬해인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미군의 푸레이쿠 기지를 습격한다. 8명 전사, 헬기 7대 파괴. 순서대로 때리는 것이 틀어지자 분노한 존슨은 같은 날 30대의 전투기(A-1, F-100)을 동원해서 월맹군 병영을 공습한다. 플레이밍 다트 작전 1. 2월 10일 베트콩은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23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다시 미군은 11일과 19일 공습으로 보복을...(플레이밍 다트 작전 2) 그리고 3월 2일 마침내 대규모 북폭인 롤링썬더 작전이 시작된다. 원래는 2월 20일에 월남 공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월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4차례로 작전이 연기되는 막장 상황이 이어져서 작전의 시작이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때까진 대규모 지상전투 수준으론 확산되지 않았으나, 결정적으로 1965년 3월 30일에 사이공의 미 대사관 폭파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미국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베트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3.2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편집]

1965년부터 베트남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미군의 대규모 증강이 이루어지며, 호주, 뉴질랜드, 한국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다른 국가들은 비전투병 등을 파병하였다.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도 무기원조나 유격대 등으로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남베트남 베트콩(with 북베트남, 소련, 중국을 비롯한 비공식 몇몇 국가 북한도 포함이다)

VS

미군 + 남베트남(with 한국, 호주, 태국, 뉴질랜드, 기타 등등의 연합군)

의 대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닌 남베트남 해방전선(N.L.F)과 기타 저항세력들이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으로 베트콩에 의한 기습+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이 벌어지는 양상이 베트남전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거의 내전 양상을 보였다고 보면 된다.(무기야 북베트남이 제공했겠지만) 물론 이런 행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백한 북-남 베트남간 휴전협정 위반. 하지만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남베트남 측이 제네바 회담에서 약조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의 이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 디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뭔가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가 생각나지 말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을 얕보고 우습게 보는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

3.2.1 월남전 한국군 파병[편집]

미국의 동맹국으로써, 한국도 전투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 참조바람.

3.3 전개[편집]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월 17일에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각종 전쟁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6년 1월에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지원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때부터 진짜로 엄청난 물자와 장비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으나,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 공동성명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3.3.1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편집]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아무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하고 싸운 경험은 잊은건가.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소총을 든 미군이 UH-1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북베트남은 몰래 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찌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베트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치민 루트를 타격한 흔적이 보이지만, 일단 정규적 공격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캄보디아나 라오스는 막을 능력도 없고, 자기들한테 크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묵인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폴 포트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주로 공세를 펼치는 세력은 북베트남군이라기 보다는 남쪽에서 양산된 베트콩이다. 물론, 북베트남에서 지원병력이나 지도를 위한 간부, 싸움을 위한 물자를 계속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니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던 셈이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월맹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3.3.2 북베트남 공격 금지[편집]

전투 대상이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 세력이었고, 미군의 신분 역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인도적 원조군>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었고 "북베트남을 직접 침공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짐!" 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북베트남 영토로 지상군이 쳐들어가지는 못하게 못이 박힌 상태였다.[13]

물론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는 잘만 들어갔지만 특수부대는 성격상 절대로 주공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숫자도 적어서 국지전에서는 강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다.[14] 대신에 Operation Rolling Thunder 등의 북폭이라 불리는 항공 공세 작전은 수차례 했지만, 결정적으로 밀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몇십 년이 걸려도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군사력으로 통일할 목표를 세운 상태에서, 미국이 뭔 짓을 해도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북폭이 북베트남 대도시에 B-52를 동원해 융단 폭격을 가한 작전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기도 아닌 대형 전략폭격기의 작전은 불가능했다.[15] 흔히 생각하는 융단폭격은 어디까지나 밀림지대, 특히 호치민루트 제압을 목적으로 행해졌을 뿐, 도시와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어디까지나 군수공장이나 철도망 같은 전략목표에 대한 조준 폭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폭이나 부수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당장 베트남전 기간 미공군/해군 항공대의 교환비는 역대 최악이었던 것으로 이름 높기도 하고...[16]

더구나 베트남의 북부 영토는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폭시 중국에 폭격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북부 국경지대는 애초에 폭격 불가.

3.3.3 미국의 막장 상황[편집]

게다가 미국에서도 반전운동 여파와 여러가지 부정적인 일들도 크게 퍼져버리면서 프래깅(하극상)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으로까지 언급되어버렸다. 1967년만 해도 공식적으로 800건이 넘는 프래깅이 적발될 정도[17]였으니, 미군 장교들은 적군보다 뒤에 부하들을 무서워해야 했다.

일례로 1967년 11월 미군 헌병이 입수한 어느 포스터에는 베트남어와 영어로 어느 미군 대위 이름과 여러가지 신상명세, 심지어 주둔지 정보까지 써있고 적군들에게 제발 이 XX 좀 죽이면 1500달러 포상금을 선물하겠다...라는 말까지 쓰여있었다. 미군 측이 난리가 난 건 물론이다. 하지만, 헌병들 수사에도 결국 이걸 만든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얼마 뒤 그 중대장은 기관총에 벌집이 된 시체로 발견된다. 헌병들은 미군 기지 안에서 등 뒤에 M-16 총알로 벌집이 된 점을 주목했으나 부대원 전원이 적군 공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터라 결국 전사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작은 사회로 서로가 서로를 묵인하는 것이다(...).

게다가 징집된 장병들은 당시는 실체도 드러나지 않았던 PTSD로 공포에 질려야 했고, 징집을 거부하며 반전운동 시위, 징집영장 불태우기, 전쟁규탄 시위까지 터지면서 미국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나온 것을 보면 술에 질펀하게 취한 연대장이 휘하 소대장에게 찰리(베트콩) 몇 놈 잡아와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밀림 깊숙히 들어가서. 그러면 미군들만 죽어나가는 게 뻔하지만...명령은 명령. 결국 소대장 브로일스 중위는 부하들을 불러와서 웃기게도 연극을 했었단다. 나뭇가지도 꺾어오고, 물도 그릇에 떠와서 무전기로 나무를 밟는 소리를 내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숲을 지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물을 첨벙첨벙 치면서 강물도 건넌다고 무전기로 뻥을 쳐가면서 1시간 넘게 보고했다! 당연히 취한 연대장은 속아넘어갔고 나중에 그냥 잠을 자버렸는데, 다음 날 그 연대장은 그런 명령을 내린 걸 전혀 기억 못하더란다. 이런 어처구니 없지만 실제로 벌어진 뻘짓 이야기들은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던 상황 속에서 미군들은 말 그대로 미쳐갔다. 상급 장교들은 사이공의 장교 클럽에서 휴가를 즐기고 더운 한낮의 땡볕을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보냈는데 이 판국에 하급 장교, 부사관, 사병들이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헬기 조종사들은 맥주에 절어있었고 다른 장병들은 마약까지 손을 댔다.

당연히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에 환각제 사용자는 5%에서 14%로, 헤로인 복용자는 2%에서 22%로 폭증했다. 더구나 이는 상원위원회의 보고서로 실상은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18] 덕분에 1971년 미군 야전병원에는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가 5천명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마약문제로 입원한 환자는 2만명이 넘었다라는 엽기적 기록이 남아있다.

이따위 상황이니 당연히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욕이 있을리가 없다. 1969년 전투기피로 기소된 건만 117건, 1970년에는 131건 등 꾸준히 증가추세였다. 종전이 다 되어가던 1972년에는 탈영한 이들만 무려 7.3%나 되었고, 미군 기준의 그 여유롭고 느슨한[19] 무단이탈은 무려 17.6%나 되었다. 이렇게 탈영한 이중 근성이 강한 이들은 북베트남을 거쳐서 중국이나 소련까지 넘어가서 미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3.3.4 낭비[편집]

미군의 낭비는 개념을 상실한 상태였다.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인들은 모두 미군들 보급 나오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지금 기준으로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물량 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전쟁시기 베트콩 하나 잡겠다고 평균적으로 들어간 비용이 무려 1명당 33만 2천 달러였다. 애초에 포병들은 하루 평균 1만발을 쏘아대었고, 소총수들은 새로 등장한 M16을 맹신한 채 자동으로 놓고 갈기기가 일쑤 였다.

여기에 압권은 B-52 폭격기였다. B-52 폭격기가 호치민 루트의 베트콩 하나 잡는데 필요한 폭탄량은 무려...100톤. 실제로 B-52는 한참 심할 때는 년간 20억 달러를 폭격으로 소모했고, 그 결과 약 150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에 그 100배의 숫자가 남파되었다라는 것이다. 20억 달러 들여서 평균적으로 100명 중에 1명 잡았던 셈이다.

B-52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앞서 언급한 북폭 역시 돈 많이 들어가고 효율 없기는 돈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평균적으로 10억 달러를 북폭에 소모했는데, 그 타격이 평균 1억 달러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B-52보다는 무려 효율이 10배 이정도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금방 복구되었다.

이 돈 때문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금태환제도(금본위제도)를 폐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의회의 동의 없이![20]

낭비한 것은 돈 뿐이 아니었다. 병력 낭비도 상당히 심각했다. 앞서 미군이 30만 명이 파병되었다고 했는데, 가장 많은 시기에는 무려 55만 명이나 되었다. 문제는 이 55만명이 모조리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라는 점이다. 미군의 위엄은 엄청나서 이 병력의 적어도 4분의 3은 비전투병력이었다. 오타가 아니다. 4분의 1이 비전투병력이고 나머지가 전투병력인 것도 아니고, 4분의 3이 비전투병력이었다. 이는 접시닦이, 요리사, 수선공 등을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이 4분의 1은 또 열심히 싸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병력은 총병력의 10분의 1수준이고, 실제로 최일선에 투입되어서 매일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전투병력의 다시 10분의 1, 즉 파병된 병력중에서 1%인 5천명 정도'를 넘어선 적이 거의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미군이 전쟁을 할 의욕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워진다.

뭣보다, 고립된 부대에게 후식용 아이스크림을 헬기로 보급했다는 게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 있던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쟁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낭비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나?(단, 물론 아이스크림 나른 건 아니고, 전투물자를 보급할 때 남는 공간에 아이스크림도 함께 나른 거기도 하지만, 공중수송능력이 얼마나 남아돌았으면 공간이 남겠는가?)

물론 정규전에 한정해서, 물량으로 적을 깔아뭉개는 건 효율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게 아니잖아?!

3.4 구정 공세와 수렁[편집]

1968년, NVA(북베트남군)와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을 이용해 공격을 하였다. 설 이전부터 미리 대규모로 병력을 잠입시켜 설 연휴에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다발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정 공세다. 사실상 이 구정 공세를 통해 베트남전의 운명이 갈리고 만다. 구정공세가 벌어지는 동안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만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 등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중계가 되었고, 미국민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입고 반전여론이 고조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3.5 케산 전투[편집]

3.5.1 전개[편집]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전투로 시작 자체는 구정 공세보다 일렀던 전투이다. 디엔 비엔 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 군의 요새였던 케산은 북 베트남과 남 베트남 사이의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이 케산을 미군이 아니라 북베트남 군이 포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즉 케산에 주둔한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북 베트남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동원된 사단이 디엔 비엔 푸에 참전했던 사단이었고,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군을 지휘했던 보 구엔 지압이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21] 이 전투의 재현이 가까웠다. 하지만 하루 평균 300회라는 어처구니 없는 미군의 공중지원이 이뤄진 케산은 결국 77일을 버텨서 포위진을 풀어버리게 된다.

3.5.2 케산 전투와 구정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편집]

케산 공세는 대놓고 디엔 비엔 푸를 흉내낸 것에 알 수 있듯이 미군에 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고, 그것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매스컴들은 구정 공세로 불타는 대사관 만큼이나 포위된 케산이 제 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게릴라전이나 벌이던 베트남 군이 이제는 미군을 포위 섬멸하는 시도를 할 정도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은 핵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사령관에게 부탁하고, 사령관인 웨스티모얼랜드는 케산과 디엔 비엔 푸는 다르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구정 공세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애초에 구정 공세와 케산 전투는 모두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왜 같은 시기에 시도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시기에 있다. 1968년. 이는 바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인 것이다. 북 베트남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를 엿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보 구엔 지압이 말한 우리는 전투에는 몇 번 진 적이 있지만 전쟁에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라는 말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북 베트남군은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실행했던 것이다.

3.6 전쟁의 종결과 남베트남의 멸망[편집]

3.6.1 미국 정치 정세의 변화[편집]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이 발표 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베트남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남한과 북한에서도 긴장이 흐르게 되어 각각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 대립하는 노선에서 선회하여 친 중국적인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핑퐁 외교)

1969년 9월 2일에는 호치민이 사망하였다.

3.6.2 끝없는 전쟁과 미국의 철수[편집]

미국의 동맹국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통적인 동맹인 영국을 포함해서 다른 친했던 나라들이 파병을 일부 하긴 해도 전투병은 잘 안보낸다든가 하는 식으로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대한민국. 미국 다음으로 전투병 숫자가 많았다.

아무튼 미국은 단계적 철수 발표 이후로는 희망도 없는 전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이어져 나간다. 미군의 철수는 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들이 떠났다. 큰 전투도, 목표도, 뚜렷한 적도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듯한 전쟁이 수 년간 이이진다. 그리고 도와줄려고 했던 놈(남베트남)까지 막장 짓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1971년이 끝날무렵에는 지상전투부대의 대부분은 떠나며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춘계공세가 일어날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나가게한다.

1972년에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결국 1973년에 북베트남과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완전 철수하게 된다.

이 때도 보기 좋은 철수를 위해서 핵 협박을 했다.[22] 물론 소련도 핵을 가진 상황이었고, 전쟁을 끝내려는 마당에 핵전쟁을 벌리기는 싫었으므로 일단 위협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23]

3.6.3 홀로 남은 남베트남의 막장[편집]

그래도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찝찝했는지, 미국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한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1975년에 북베트남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박살나 버렸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 군대는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전투기 조종사 중에도 위장 잠입한 사람이 있어서, 공습 명령을 받자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북베트남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뇌물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타이까지 날아가서 타이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 공군참모총장이자 전직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 흠좀무. 이 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타이 측에서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

보병들은 미군 따라서 싸운 기억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꼴이 되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밖에 지휘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무엇보다도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가, 북베트남의 대공세에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철수 작전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도 사령관은 그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 게다가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도 레 민 다오[24] 준장이 지휘하는 6천명 남짓의 18사단은 쑤엔록에서 4만여명 규모의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1주일간이나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하던 반 티엔 둥 장군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1개 사단의 분투가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게다가 18사단의 분투는 대세가 기울어진 후 이야기. 따라서 재배치를 틈타서 호찌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내리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3.6.4 남베트남의 정권교체와 베트남의 통일[편집]

남베트남 해방전선 전차가 대통령 독립궁으로 진격하는 사진[25].

결국 1975년 3월 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 4월 21일응우옌티에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바로 탈출한 이후에 4월 30일에는 결국 사이공까지 함락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월맹군은 최소 2년이 걸릴 것 같던 미군 후퇴 이후의 남베트남 점령작전이 55일만에 끝나자 놀랐다고 한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파리협정」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패망과 아비규환에 빠진 남베트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그리고 40여년 뒤 동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물론 남베트남이 망한 뒤 보복이라는 걸 해주긴 했지만... 문제가 좀 있었다.

하나는 좀 심하게 말해서 미친짓인 천하의 개쌍놈 집단인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참고로 크메르 루주는 현재 공산권 내에서도 비교할 만한 집단이 김씨왕조 정도밖에 안 될 정도의 극악무도한 족속들이다. 이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 정권의 정당성만 보태 주는 꼴이 되었다. 나머지 또 하나는 이전부터 하던 경제제재라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부적절한 게, 리처드 닉슨데탕트를 주장하던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그도 워터게이트로 물먹으면서 제럴드 포드가 올랐다. 닉슨은 자신의 집권기였으면 당연히 군사를 파견했을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하간 참 절묘한 타이밍. 전쟁의 막바지에서 공산 베트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남았다.

미국을 비롯한 한국 등 동맹국가에서는 베트남전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입안했다.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세운 작전의 일환인데, 흔히 프리퀀트 윈드 작전 하면 당일 새벽 미 대사관 철수작전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최종 탈출작전인 옵션 4이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로 구성되었다.
옵션 1은 탄손누트 공군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26]
옵션 2는 군용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
옵션 3는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수송하는 것이었다.
옵션 4는 최종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

일단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편 및 배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역시 재월남 한국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LST 두 척을 파견하였다.[27] 그러나 긴 전쟁기간 동안 나름대로 베트남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민간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놓고 떠나기를 주저했고, 설상가상으로 4월 28일 탄손누트 공군기지가 폭격당한 후에는 비행기편을 통한 탈출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미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시 미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동맹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4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사비 지출이 된다.


미 국제개발청 직원 숙소 옥상 LZ로 몰려드는 사람들. 미국 대사관으로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 [28] 아래 나오는 영상에도 이 장면이 마치 그레이엄 대사의 탈출 장면처럼 나와있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단계인 옵션 4가 발동, 탄손누트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 미국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29]

4월 30일 새벽 5시, 마지막 헬기편으로 미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마지막으로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탈출헬기에 오르며 미군의 베트남전 개입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이 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 추가로 탈출한 사람들까지 합쳐 보트피플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남베트남은 베트콩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 적화통일되었다.

사이공 함락 당시의 영상

밀덕이라면 4분 10초에서 경악을 하겠지 철수작전 당시 대량의 헬리콥터를 동원하다 보니 항공모함이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초과했고, 이 때문에 당장 필요없는 기체는 바다로 버려야 했다.

그리고 미국의 예상처럼, 또는 의도와는 반대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행을 위해 캄보디아라오스의 국정에 혼란을 초래해 버린 결과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 당시 미국이 우려했던 바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나는 태국도 공산화 되는 일은 없었다. 단 태국의 경우는 원래 막장국가급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태국은 한국보다 잘 살았다. 다른 것으로는 미국이 악몽스럽게 생각했던 인도의 공산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는 친 소련이지만 반중적인 입장이 된다.

그리고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교민 100여명과 중앙정보부출신 이대용 공사등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이후 식량부족과 납북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했으며, 이대용 공사외 고위직 2명은 월맹군에 체포당해 기아와 북한측의 회유등으로 고생했다. 다행히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30]

3.7 전후[편집]

3.7.1 미국에 끼친 영향[편집]

미국은 전쟁하느라 엄청난 돈을 부은 데다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지독한 정치, 경제위기를 겪고 사회적으로는 염세주의와 마약의 확산과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현실적응, 무엇보다 여지껏 전쟁에서 져본적 없다던 미국의 첫 패배라는 굴욕등 얻은 것은 거의 없고 잃기만 한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있다.

물론 월남전 참전전우회에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같은 연합군이 진게 아니다고 주장하지만...베트남 전쟁에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잡혀 고문 끝에 두 팔을 다쳐 후유증으로 지금도 두 팔을 높이 못 드는 존 매케인2000년 베트남전쟁이 왜 미국이 졌는지 열불난다는 연설을 했다가 베트남 측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들이 같은 국민들에게 살인자라는 소리를 듣는 등의 현실과 PTSD등에 의해 마약을 복용하는 사례도 있게 되면서 미국 사회도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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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자신의 사위이자 미 해병대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찰스 로브 대위의 당시 전쟁상황의 음성기록을 듣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중 하나가 람보1이다.(소설, 영화) 베트남 전쟁 참전 후 귀국한 람보가 겪는 PTSD와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람보의 동료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다. 게다가 람보 외에도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만화와 영화들 때문에 지금도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디엔비엔푸 같은 만화 등도 있으니.

거기다 당연히 실상을 알던 사람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으로 찍히고, 냉전이 끝난 1990년대를 넘어서야 그런 인식이 좀 잠잠해진다. 심지어 1980년대 유시민은 그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골리앗을 구원한 다윗이라는 식으로 북베트남을 미화하기도 했고,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북베트남을 미화하기도 했다.

여하간,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패배한 병크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대한민국 국군도 미국 편에 서서 파병해 참전했다. 그러나 한국군이 아무리 잘 싸웠다 해도 파병으로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에 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잘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큰 영향이 없었는지 궁금하다면 글을 위로 올려서 다시 읽어보자. 아무리 잘 싸워도 이건 답이 없잖아(...).[32] 분명 대한민국 국군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에게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구정공세이후 유일하게 선전했던 전투지역은 맹호부대의 안케패스지역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치 소강상태였던것에 반해 한국군만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파병 규모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기도 하다.

또한 한국군 해병대가 크게 패배한 짜빈박 참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국 해병대가 애용한, 짜빈동 전투로 그 위력을 입증했던 중대 전술기지가 당대에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또 다시 입증해준 셈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한국 해병대가 미처 철거하지 않고 넘어간 걸 북베트남군이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남베트남 멸망시에 한국해군은 자국민과 라이따이한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피난을 도왔고 실제로 한국에 정착하게 해주었다. 공산권에서 한국을 겨냥해 특별히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술했듯이 애시당초 베트남 전쟁 자체가 심각하게 막장이라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뭘 어떻게 하건 전쟁의 흐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도 하고.

3.7.2 고엽제 문제[편집]

전쟁중 미군은 VC나 북베트남군들의 전투 패턴이었던 게릴라전에 용이한 밀림지역에 타격을 주기 위하여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들을 항공 작전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포하는 고엽작전을 벌였고 이 고엽제들은 본래 목적이었던 베트남의 산림과 농업까지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이옥신등의 성분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으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나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후세대까지 지금까지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엄청난 후유증을 야기시키도 하였다.

3.7.3 한장의 사진[편집]

북 베트남의 구정 공세 당시 사진가 에디 애덤스(Eddie Adams)가 사이공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바로 "General Nguyen Ngoc Loan executing a Viet Cong prisoner in Saigon"

Nguyen.jpg

시가전 중 사로잡힌 베트콩 장교로 추정되는 응우옌 반 램(Nguyễn Văn Lem)을 남베트남 경찰서장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 즉시 자신의 권총으로 사살한다. 경찰서장과 같이 있던 AP통신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와 NBC 취재팀이 그 현장을 취재했다.

구정 공세는 전술적으로 북베트남의 완벽한 실패였다. 월남군만이라도 단독 북진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북진 통일이 가능했을 정도로 월맹 주력부대와 베트콩의 병력손실은 심각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베트남전 반전 시위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고, 미국이 미적거리는 사이에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던 월맹군이 기사회생할 시간을 주었다.

이 사진을 촬영한 에디 애덤스는 1969년 퓰리쳐상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서장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서장을 내 카메라로 죽였다. 아직도 카메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기이다. 사람들은 사진들을 믿지만 사진들은 거짓말 한다, 조작되지 않은 사진들도 말이다. 사진은 오직 진실의 절반을 묘사할 뿐이다. 내 사진이 당신들에게 전달하지 않은 질문이 있다. "무더운 날씨에, 온 사방에서 혼란스러운 전투가 진행중일때, 소위 '나쁜놈'이 미군 두세명을 죽이고 당신 앞에 잡혀왔다면, 당신은 무엇을 했을까?"

란 글을 기고했고, 로안 서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그들의 명예를 훼손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로안 서장이 암에 걸려 죽었을 때 에디 애덤스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는 영웅이였다. 미국은 그의 죽음을 슬퍼해야 한다. 미국인들이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게 너무 싫다.

남베트남 측에 의하면, 로안에 의해 사살당한 자는 월맹 암살단의 지도자였으며 그날의목표는 경찰, 안되면 경찰 가족들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자는 최소 7명의 경찰 가족의 시체가 포함된 학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진이 촬영되고 몇개월 후, 로안 서장은 적 기관총에 의해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 로안은 남베트남을 떠나 미국으로 피난을 가고 워싱턴 D.C.에서 조그만 피자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1998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67세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다.그가 죽은후 그에 대해 좀 더 많이 알려지게 됐는데 전쟁 당시 미국이 남베트남 몰래 벌였던 작전등을 꽤 많이 누설하고 미국의 비밀 작전등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로안을 "Trouble-maker" 이라고 하며 싫어했다고 한다.

응우옌 로안은 국가주의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매우 어렵고 복잡했던 사이공 치안 문제를 많이 개선했다고 한다. 또한 능숙한 조종사로써 직접 베트콩을 대상으로 지상타격임무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도 빨갱이 사냥에 광분한 사람이라 항상 옳지만은 않았다는 것. 구정 공세 항목 참조.

3.7.4 베트남전의 전쟁범죄/민간인 학살[편집]

  • 베트콩
    • 쩌우독 학살 사건
    • 후에 학살 사건
  • 한국 - 베트남 전쟁/한국군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학살이 존재했다. 퐁니/퐁넛 학살사건도 그렇고, 1969년에 김종수 소위가 군사법원에서 학살을 벌인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이후 15년형으로 감형된 것이 기록상의 유일한 사례다. 이전 문서는 이 사례외에 현재 위키피디아에 서술된 학살 항목이 모두 한겨레가 출처임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적어 놓았는데 실제로 캠브리지 트리니티 컬리지 석좌교수인 권헌익 교수의 책을 인용한 항목등이 존재하며 하이마을 학살사건에서 위령비를 세운건 월남전참전전우복지회로 당시 참전용사들도 포함된 단체이다. 또한 증오비 역시 현장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기록물로서 완전히 기각해야할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물론 위의 출처들로 인해서 위키피디아에 서술된 모든 항목이 신빙성을 가지는건 아니고 따져볼 문제지만, 다른 모든 것은 진보언론과 베트콩의 언플이다라는 식으로 적어놓은 것은 문서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다. 또한 공식적으로 밝혀진 퐁니/퐁넛 사건역시 사망자 수가 13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 이것 하나뿐이었으니 문제가 안된다는 식의 서술 역시 지양해야 할 것이다.

정확한 정보 없이 학살이 없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반대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을 하는 것도 둘 다 지양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실관계는 철저히 밝히되, 만약 잘못된 과거가 있다면 겸허히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인권유린 면에서 더 주목받는 것은 라이따이한 문제다. 현재진행형인 문제라..자세한 사항은 라이따이한 항목 참조.

3.7.5 전후 베트남의 사정[편집]

전후 북베트남의 전쟁수행을 지원했던 베트콩(VC)과 간첩, 좌파인사들이 전후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의 주요 인물들은 일망타진 된 상황이었고, 그 빈자리는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요원남파간첩들이 메꾸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베트남 공화국 항목 참조.

여러 목적으로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은 약 6만 5천명 ~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잘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통계가 좀 과장되어 알려진 측면이 있다. 북베트남쪽 정부가 들어선 뒤, 남베트남 정부 관련인사, 고위 포로, 고위층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베트남이 통일되기까지 1년의 기간 동안 남베트남 경제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하던 화교들, 남베트남 정권의 수뇌부에 기생하고 있던 부패관료들, 반공주의자들은 종전후 많은 숫자가 망명을 하거나 보트피플이 되어 남베트남을 탈출했다. 쉽게 말해 숙청도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상황. 물론 무재판 처형'만' 6만 5천에서 10만이라는 숫자를 적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릴 부분. 그리고 보트 피플 과정에서 질병이나 기근 혹은 해적 등에 결려 많은 숫자가 사망(숫자에 관한 항목은 베트남 공화국 참조)해 간접적으로 숙청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등은 사상개조학습명분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다.[33]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숙청에 대한 논지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제각각인데 확실한 것은 남베트남 관련 고위직(100만명)의 재교육을 위한 캠프는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서의 대접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삼청교육대 수준이 실상인데 그런 이유로 그런 재교육 캠프를 비판하는 의견과 별거 아니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34] 여기에 수용된 사람은 약 1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에서의 숙청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대규모 보트피플이 발생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80만명이나 되었다. 특히 보트피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것은 1978년 이후로 종전 된지 3년이 지난 뒤였다. 괜히 한국의 친일파를 예를 들어 이들이 지주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라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해 빠져나갔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진짜 기득권 세력은 미국이 철수한 1973년부터 남베트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진작에 베트남을 빠져나갔고, 1978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선생님, 의사, 상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트 피플의 또다른 경우는 1979년 2월~3월까지 진행된 중국-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탄압을 받을 위기에 있었던 중국계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의 친일파와는 맥을 달리 한다.

한국에서는 초기에는 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간첩질을 하지말자거나(...) 우익이 부패하지 말자라는 걸 모토로 했고 한국보다 우익이 개판인 베트남은 망해도 싸지만 한국은 든든하다라는 걸 강조했다. 반면 북한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의 굴욕을 갚기 위해서 북침을 감행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후 했다는 연설인 "전쟁이 벌어지면 잃을 것은 철조망이요. 얻을 것은 조국통일이다"라는 말은 전쟁하자라는 말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일으키면 우리는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것.[35]

다만 1980년대 군사정권하에 벌어진 학생시위나 광주민주화 운동 등에 대한 흑색선전으로서 베트남의 막장화와 도시게릴라들에 대한 공포감을 부풀린 면도 있었다. 이대용 공사의 수기를 극화한 사이공 억류기가 고 김무생 주연으로 극화 되었다. 일명 한국판 킬링필드인데 엽기적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 시대가 시대인지라 재방은 어렵다[36][37]

80년대 베트남 수용소라는 엄한 제목으로 출간된 고백수기가 있는데 이 책은 전직 학생운동 지도자가 통일된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절반 정도는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어떤 사람이고 사이공 티우 정권에 대한 투쟁을 얼마나 잘했으며, 절반 정도는 무식하고 말 안 통하는 북쪽 동무들에 대한 비난, 나머지 절반은 그래서 체포되었을 때의 일이다. 공산권 인권탄압 교과서인 평양의 어항과 비교하지 말자.[38]

4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하지만 전쟁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미국이 물러가자 이젠 지역 패권을 노리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간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전통적인 적국이었던 중국이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베트남은 캄보디아와의 분쟁 때문에 중국과 전쟁을 한다. 자세한 것은 링크를 참고하길 바란다.

5 기타[편집]

5.1 베트남 전쟁의 교훈?[편집]

우리나라에선 웹상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대 및 예비역 교육장에서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 상황과 접목시켜 안보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의 역사 및 전쟁의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의 일부 과정과 결과만을 부각하는 것으로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여 그대로 동급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제 식민지에서 광복이 된 이후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후견자로 둔채 분단이 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대규모 침략을 당해 정당성 및 명분이 남한 측에 있으며 UN군 참전국가들이 일방적으로 남한을 도왔던 한국전쟁 상황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위의 전쟁 배경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남베트남 및 미국의 정당성과 명분, 민족성이 극히 떨어졌었다. 즉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과 배경부터가 차이가 있으며[39], 전쟁의 전개 역시 한국전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고 그 후의 상황 역시 후술하겠지만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아 보여도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40] .

이런데도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전체적인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일부 과정과 결과만을 엮은 이러한 잘못된 안보교육은 베트남에 대한 잘못된 역사 왜곡을 불러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 한월 외교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만나기도 쉽진 않겠지만 혹여 베트남인 앞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베트남 관련 안보 꾸준글이나 군 시절 당시 배운 걸 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자.[41] 몇몇 우리 국민들은 베트남이 공산정권 하에 적화통일 되어 압제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는 모르나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개소리일 뿐이다.[42] 베트남인들의 역사는 그들 자신들이 제일 잘 알고 잘 이해하는 것이다. 잘못하면 얕은 지식으로 인해 싸움이 나고 한국인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인식이 나빠지니 주의하자.

몇몇 보수 단체는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안보 환경이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지리적으로 우리나라는 양쪽이 바다라 간첩세력의 지속적인 보급이 불가능하다.[43] 반면 베트남은 라오스나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있는 정글들을 통해 지속적인 물자보급을 이룰 수 있었다. 지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 안보체계를 남베트남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 역시 무리다. 우선 국민들이 가지는 인식과 지식 등에서도 차이가 난다. 적어도 베트남 전쟁과 같은 냉전 시기에는 세계인들이 공산주의의 모순과 무서움에 대한 인식이 적어 내전이나 혁명 이후 공산주의를 환영하는 국가들도 있었으나, 현 대한민국 국민들은 굳이 학문적으로 공산주의를 공부하지 않아도 공산주의가 얼마나 가난하고 모순적인 체제인지와 체제에서 오는 그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3대 돼지 정권만 봐도 답 나온다[44] 더군다나 집권 정당의 화해 분위기 혹은 대립 분위기마다 다른 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북한 정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좋지 않다.[45]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든 뭐든 그 어떤 단체를 가장한 국내 반정부 세력이 북한 정권을 위해 변호와 옹호를 해도 오히려 그들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될 뿐이고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옭아맬 뿐이다.[46]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베트남은 관료들이 적에게 무기 팔아 넘길 정도로 썩었었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적어도 북한에게 무기를 팔아줄 정도로 썩진 않았다.그 쯤 되면 보다못한 미국이 우리 정부를 갈아치웠겠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던 군사독재 정권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민주화와 남북 대화의 분위기를 마련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 정권과 국내 종북세력을 경계하는 것을 늦추지 않으며 그 예시 중 하나인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에서도 보듯이 대한민국에서 반국가적 행동이 어떤 결말을 걷는지 잘 알 수가 있다.[47]

결론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인용한 안보교육 등에서 베트남 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 이후가 우리나라 상황과 같다는 등의 교육 내용은 틀렸지만, '남남 갈등을 일으키는 내부의 적을 조심하자' 이 한마디는 귀기울일 교훈이 되는 것이며 현 대한민국 상황에서 그 내부의 적은 확고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단체를 가르키는 것인지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서 갈릴 수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보통 분단의 특성상 종북을 특히 강조하지만 갈등을 조장하고 나라를 말아먹는 세력이 종북만 있는 것도 아니며, 상황에 따라선 더 심각한 이적세력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종북에만 집중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참고로 한국 웹에 나도는 '베트남 숙청 사진'들은 상당수가 캄보디아의 사진이기도 하다. 엄연히 수교를 맺고 있는 나라에 대한 사실 왜곡이 될 수 있으므로 이런 사진들은 주의하자. 하긴 월남 '패망'이란 표현도 수교국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말이긴 하다. 베트남 관광청 홈페이지에선 '남베트남의 자유화'라 한다. 흠좀무. 만약 "외국 사람이 6.25전쟁보고 "그니깐 에... '남조선 민족해방전쟁'말이죠. 그거 실패한 게 1953년이던가요?"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과 북베트남 측에 명분이 있었다는 점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므로[48][49][50] 최소한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베트남 사람 눈치보는거 이전에 역사학적 중립성 차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냥 '베트남 전쟁'이라는 표현이 보편적 표현이다.

5.2 전쟁 중 사용한 장비 목록[편집]

베트남 전쟁/장비 항목 참조.

5.3 베트남 전쟁을 다룬 창작물[편집]

5.3.1 소설[편집]

5.3.2 드라마[편집]

5.3.3 영화[편집]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중에 반전 메시지를 담은 걸작 전쟁영화들이 많다.
특히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60년대를 상징하는 사건이기에 60년대를 다루는 할리우드 작품이라면 거의 반드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 대게 전쟁이 한 인격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가에 대한 고찰이 담긴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전쟁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명작들이 많다.

가수 남진의 베트남전 경험담이 각색되어 들어가 있다. 실제로 남진은 해병대에 복무하던 중 베트남전에 파견되었는데 전쟁 과정에서 몇 차례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윤덕수와 친구 천달구가 남진을 만나고, 현지 주민들을 구출하여 철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윤덕수는 주민 구출 과정에서 베트콩에 의해 총상을 입은 채 귀국하며, 천달구는 자기가 구출한 현지 주민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에 이르는 장면이 나온다.
  • 굿모닝 베트남(미국)
  • 님은 먼 곳에(한국, 이준익)
  • 디어 헌터(미국)
  • 라스페기(프랑스)[54]
  • 람보 : 베트남전쟁 중의 람보 활약에 관한 내용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1편부터 4편까지 전부 베트남전쟁에 관한내용이라고 여기에도 과거 누군가 써 놓았다.[55] 하지만 람보는 1편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후,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고, 3편은 아프가니스탄, 4편은 미얀마에서 싸우는 내용이다. 즉 람보시리즈에는 1,3,4편에는 베트남이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특히 람보 1편은 베트남인들을 죽이는 내용이라는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 부적응자가 된 참전용사의 이야기로 오히려 반전영화에 좀 더 가깝다.
  • 머나먼 사이공(한국)
  • 미친 사랑의 노래[56](한국)
  • 알 포인트 (한국, 공수창)
  • 왓치맨(영화)
여기서는 초월적 존재인 닥터 맨하탄덕분에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승리한다. 일종의 대체역사인 셈. 극중 베트남에서 코미디언닥터 맨하탄 사이에 있던 일이, 닥터 맨하탄의 중후반 행적의 복선이 된다.
베트남전에 뮤턴트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부대가 참전한 것으로 묘사되며, 미스틱은 자신의 동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사이공 미군기지에 잠입한다. 또한 중반에 미국의 패전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평화협정이 주요 무대이자 분기점이 된다.

5.3.4 뮤지컬[편집]

5.3.5 만화[편집]

5.3.6 게임[편집]

5.3.7 노래[편집]

6 관련 항목[편집]

  1.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9세 소녀 판티 킴푹(가운데)이 네이팜탄이 떨어지면서 불길이 옮겨붙은 옷을 모두 벗은 채 울부짖으며 거리를 내달리고 있는 모습.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킴푹은 심한 화상을 입었다. 관련 영상을 보면 등의 피부가 죄다 타 벗겨진 것을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대단히 유명한 사진이다. AP 사진기자 닉 우트는 이 사진을 촬영하여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우트와 킴푹은 현재까지도 서로 연락하고 지내며 킴푹은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다.
  2. 실제로 이 단어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3. 호치민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호치민과 실제로 활동하기도 했던 OSS, 바로 CIA의 전신인 기구 정도였다.
  4.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으로 마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었는데 이때 베트남이 등장한 것이다.
  5. 이 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6. 이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중증이다시피한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있었다. 당연한게 한국전쟁이후 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화가 확산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늘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이전에 매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공산주의의 '공'자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공산주의를 지향한 호찌민 정권에 협조적일 이유가 없었다.
  7. 당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분단된지 얼마 오래되지도 않았고, 좌파는 남에도 북에도 많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 좌파인 것은 사실 별로 이상한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반공주의가 심화된 반면, 남베트남에는 그런거 없다. 게다가 호치민은 오랫동안 베트남 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사람이었기에 전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제3세계 공산주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종종 북쪽 태조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 행적을 보면 혹부리영감보단 김구나, 여운형의 공산주의자 버전에 가깝다.
  8. 어느 정도였냐 하면 미군 철수 이후 전황이 기울어 주요 도시가 차례차례 함락되어가는 상황에도 징병반대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상황이었다. 이쯤되면 그냥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 자체가 없었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근데 더 가관인건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병징집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이다.(...)
  9.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미국 하드코어 그룹 Rage Against The Machine의 1992년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표지로 쓰였다.
  10. 그것도 미국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보란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영어자막을 달고 미국에서도 방송하니 이 방송을 본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어이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아씨바 할말을 잃었슴다
  11. 그런데, 문제는 베트남의 남북 분단 이후 숙청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한 통계가 없다. ㅎㄷㄷ. 아직도 찾을수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호치민 빠와 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그렇게 많이 안 죽이고 부패한 사람들만 처벌했다, 한쪽에서는 디립다 많이 죽였다 등등...
  12. 이 것은 전임자인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대한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중 하나이다. 상원의원 시절 베트남을 찾았던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Cat Shit One에서도 베크위스 소령이 "이건 뭐 트럭은 박살내도 되지만 트럭 공장은 박살내지 말라는 소리냐?"라며 이걸 깐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방어는 하되 공격은 하지 말라는 소리다. 공격이 되어야 상대방의 공격하는 힘의 근원을 부술텐데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다.
  14. 북한의 특수부대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북한은 특수부대를 보낼 능력도 없지만.
  15. 다만 라인벡커2 작전기간중 정치적 효과를 노리고 B-52가 하노이를 강행폭격한 적은 있다. B-52의 강력한 ECM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수의 폭격기를 손실. 물론 이 때에도 조준폭격이었지 융단폭격을 하지는 않았다.
  16. 사실 이건 F-4로 대표되는 미국 공군의 병크, 즉 미사일 만능주의로 달렸던 결과였다. 이 착각은 심각해서 한국전쟁 시기 12대 1까지 벌어졌던 교전비는 베트남 전쟁 3대 1, 2대1을 거쳐서 MIG-21이 등장할 때에는 0.85대 1. 즉 오히려 밀린다라는 상황까지 진행된 것이다.
  17. 기간은 다르지만 좀 더 온건하고 확정적인 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총 790회 발생하였고, 그 결과로 사망한 장교가 83명이나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발적 사고를 포함하겠으나 수류탄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애초에 프래깅의 원 뜻도 수류탄을 사용한 상관 살해이다.
  18. 단적으로 1981년 미국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전 참전해서 실제로 싸웠던 군인의 25%가 마약류 범죄로 체포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19. 이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시기 미군의 무단이탈이라는 것이 자신의 근무지에서 30일 이내로 사라진 상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20.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위키러들에게 설명해주자면, 이 이전에는 금으로 돈의 가치를 계산했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금을 받쳐주는 게 없다는 의미인데, 이런 상황 속에서 돈을 마구 찍어낼 수 있고, 저축을 한다고 해도 정부의 입장에서는 "괜찮아, 묶인 돈을 채우면(더 찍어내면) 돼!" 라고 말하고 더 찍으면 된다(물론 현실에선 제약이 좀 있다). 그리고 물가는 상승한다. 돈은 결국 부채(빚)가 된다. 물론 이로 인해서 세계경제에 커다란 호황의 거품이 생기는데, 문제는 이 방울이 나중에는...펑!
  21. 이에 대해 지압은 "우리는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참가설을 일축했다.
  22. 이 때 핵 협박을 통해서 덜 쪽팔리는 퇴각을 이뤄낸 인물이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이다.
  23. 사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1949년이었으므로, 애초에 프랑스에 제의하던 시기에는 이미 소련도 핵은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핵 협박은 핵을 쏘지 않기 때문, 혹은 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애초에 상대도 핵 보유국이 아닌한 핵 협박 자체는 그 다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24. 남베트남군의 몇 안되는 유능하고 청렴한 지휘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25. 수정 전에는 월맹군이라고 되어있었지만 월맹군이 아니라 베트콩이다.
  26. 한국의 LST 탈출 작전이 끝나고 한국 대사관 직원 15명들은 미국의 군용기를 기다리며 대사관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으로 금일 비행기 탈출 계획은 취소 됐으니 내일로 연기된다고 통하가 온다. 그러자 어린 직원 한명이 지금부터 각개약진을 할 때이니 나 혼자 민항기 타고 도망가겠다고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가는길에 내 골프채 태국 대사관에 갔다 주게"라고 말하며 보내준다. 이 직원 비행기를 탈려고 기다리는데 월맹군이 공황 활주로에 폭격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그 직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탄손누트 공군기지는 활주로의 파괴로 이용하지 못핬다.
  27. 공식적으로는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이였다. 그래서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루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상황이 안좋아 지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지도 LST선만 탈출하라고 시간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LST 함대사령관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교민들중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한 불법 체류자였다는 것. 그런데 남베트남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주면 비자 검사 안하고 한국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동의하고 수송작전을 시작하였다. 한국 교민들은 왠만큼 다 태웠는데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안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한밤중에 그냥 출발하였는데 먼저 출발한 수송선은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두고 베트남 사람들을 전부 위에 올려 인간방패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월맹군들이 장악한 수로를 통과하여 나왔고 3시간뒤에 출발한 두번째 수송선은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후레쉬 하나로 물길을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측에서는 VIP를 다 안태웠다고 정선하라! 안그러면 나포하겠다! 하며 협박하는 상황이였다. 이들이 출발한 항구는 다음날 폭격 당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15명은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남았다.
  28. 이곳이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배정된 시큐리티 포인트 3이었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시큐리티 포인트 3으로 탈출하라는 미국 대사관의 지시를 받고 건물로 진입을 시도 하였지만, 입구에서 한국 사람을 태워 가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문을 안 열어 주었다. 결국 급박한 상황 속에 직원들은 그냥 조금 더 내려가면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강행했다. 하지만 조금 늦게 도착하여 문 두들기다가 실패한 이대용 공사등 2명은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갔고, 이후 이들은 그대로 월맹에 억류되어 기나긴 포로 생활을 한다. 아마도 너무나 혼란스러워 미국 대사관과 시큐리티 포인트3 사이에 연락이 안된 듯 하다. 마지막으로 나타나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가 실패한 한국일보 특파원 안병찬 기자에 의하면 만약 들어갔어도 내 차례가 와서 헬기를 탈수 있을지 의문이었다고.
  29. 이때의 상황은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써 4월 30일 새벽 5시 마지막 헬기편으로 탈출한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를 보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90년대 드라마인 머나먼 쏭바강에서도 사이공 함락 이후 주인공이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하는 과정을 아주 정확히 묘사해 놓았다. 말 그대로 난장판 그 자체.
  30. 베트남 측은 북한의 눈치를 보다가 중월전쟁에서 북한이 중국 편을 들자 이들을 모두 석방했다.
  31. 안타깝게도 이때 참전했던 상당수의 장병들이 사회부적격자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범죄자로 타락하는 등의 비극을 겪었다. 물론 대부분은 정상적인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정신질환을 겪고 사는 사람도 있는 등 참으로 여러모로 미국에게 있어서는 괴로웠던 전쟁이었다.
  32.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한국군이 방어하고 안정화 시킨 지역이 1번 국도를 타는 지역들이었다. 안정화 작전덕에 인구도 유입증가가 될정도로 안정화 지역이었는데 한국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이 제대로 싸우거나 방어도 못하고 북베트남군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33. 물론 그들이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부역자이고 북베트남 입장에서는 침략자들에게 빌붙어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며 민중들을 탄압했던 존재이므로 그들의 사상을 청소하고 싶었을 수 있다. 사상을 개조한다는 것은 폭력이긴 한데 그렇다고 위쪽 동네어떤 대원수처럼 생명을 청소해버리는 것은 더 심각한 인권침해니깐(...)
  34. 이런 재교육 캠프에서 갖은 학대를 받은 사람중에 대한민국 공사 이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소속 무관이었고 예비역 장성이었기 때문에 외교특권을 박탈당하고 온갖 고생끝에 간신히 귀환한다. 이 사람이 당했던 이야기를 본다면 베트남에서 인권탄압이 없었다거나 견딜 만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35. 사실 중, 소 분쟁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북한도 주체사상으로 고립되었던터라 이전과 같은 원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 심지어 노골적으로 도움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36. 이대용 공사는 당시 남한 정부를 미국의 괴뢰 정부로 인식하고 있던 공산권의 시각 때문에 더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근데 괴뢰까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극단적 친미 정권이었던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가끔 대들기도 했지만 안습...쉽게 말하면 미국의 간첩 취급을 받은것. 저 한국인은 위험한 한국인이다
  37.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공사는 당신 같은 고위직이 무사히 살아온걸 보면전향했을거라는 의심으로 곤욕을 치른다. 심지어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월간조선에 했다가 욕을 무척 먹었다. 근데 간첩 아니잖아
  38. 여담으로 저자는 외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북베트남 정권의 출국허가를 받아 미국에서 살았다.
  39. 간단히 말해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베트남 전쟁은 냉전보다는 독립전쟁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40. 한국전쟁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김일성이란 한 인물의 야심에 의해서 발생한 침략전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더구나 6.25 전쟁항목에도 서술된 것이지만 당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전쟁후 처리역시 만만치 않았던데다가 서로가 모두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위해 몸을 사리던 때였는데 그걸 김일성이 보기좋게 깨뜨려버린것이다. 그리고 애시당초 호치민은 소련에 가서 남베트남을 공격할 수 있게 지원해달라고 모스크바를 48번이나 방문해 떼를 쓰는 애보다도 못한 짓은 한 적이 없다! 여기에 한국은 이미 1948년 8월 15일 UN에서 한반도의 합법정부의 승인을 받은나라다! 정통성이 애매모호한 남베트남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41. 참고로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가 대대적으로 받아들여진 상태다.(...)
  42. 사실 베트남이 공산정권 가운데서는 그나마 국민들의 선거권이 잘 보장되는 축에 속한다. 북한에선 보통선거가 펼쳐지고 있다지만 1선거구에 1명씩만 공천해서 당선되는게 일반화 된지 이미 반세기를 넘어섰고 중국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산당원만이 투표할수있다. 그에 비하면 베트남은 국회의원 선거에선 한 선거구에 1명만 나가서 당선되는 식이 아니라 여려명이 나와서 그나마 선택권은 보장되긴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얘기는 아니며(일단 제도적으로 다당제가 아니라 일당제라서 야당의 선거참여가 봉쇄되어있어 무소속 후보들들은 선거에 나올수 있으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해서 그 수가 적다. 그러니까 계파별로 뽑는 것만 가능한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그냥 여타 공산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라는 얘기.
  43. 무장공비들이 침투했는데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전멸한 이유를 생각하면 쉽다. 고정간첩의 지원도 생각 할 수 있으나 고정간첩의 역할은 정보 수집 및 개인공작의 역할이 크며 남파된 간첩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려는 순간 신분이 들통나 국정원과 경찰에 의해 체포될 공산이 크다.
  44. 북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북한은 헌법 개정으로 인해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냥 독재왕정국가다(..). 여기에 북한은 얼마전 자신들의 헌법에서 '사회주의'라는 정치이념도 삭제했다.
  45. 북한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은 언젠가 평화적으로 합쳐질 통일의 대상이고 북한 주민들이 한민족이라는 생각으로 우호적일 수 있으나 독재와 압제를 일삼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는 국민은 종북이 아닌 이상 드물다.
  46. 물론 각종 단체로 가장한 반정부 세력의 남남갈등과 그로 인해 분열되는 여론의 파장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각종 단체의 활동을 베트남 전쟁 때의 상황과 같이 내란을 위한 반정부 활동으로 치부하는 것도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정당한 비판은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난무하는 언론과 주장에 대한 판단은 국민 개개인의 선택과 지식, 현명함에 달려 있다.
  47. 국가보안법이라는 전시에 걸맞는 수준의 사상법을 유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항목 참고. 애초에 극도의 혼란기에 만들어진 법이다.
  48. 북베트남의 전신이 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세기 말~1910년대 까지 걸쳐졌던 근왕주의, 성리학적 향촌에 기반한 독립 운동이 전멸 당하고, 다른 좌익 계열 독립 단체였던 VNQDD 또한 망한 이후 베트남 국내외에서 거의 유일하게 거대 조직화 된 체계적인 독립 운동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 주축으로 터진 1930년의 응에 안 소비에트 봉기는 월남 국체가 프랑스에게 넘어 간 이후 유일하게 베트남인들이 식민 당국을 일년의 짦은 기간이나마 직접 몰아내고 해방구를 성립해 본 경험이었다. 프랑스 식민 정권 아래 가열찬 탄압을 받으면서도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30년대와 2차대전 시기, 그리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를 들어 총력전을 벌이는 동시에 전국의 자신들이 손이 닫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토지 개혁, 빈농 구제, 교육 사업, 행정 체계 건설을 통해 가시적인 건국 활동을 주도했다. 2차대전 직후 베트남의 해방 조차 연합군 손에서 이루어 진게 아니라 일제 패망 직전 낌세를 눈치 첸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8월 혁명이라는 일제 봉기를 일으켜 일본을 몰아냈다. 그리고 이 8월 독립 혁명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고도 하노이의 탕롱궁에서 프랑스의 식민 괴뢰 왕정의 마지막 왕이었던 바오다이에게 공식적인 건국식을 치루며 옥쇄와 왕검을 "짐은 오늘부로 평범한 베트남 시민으로 돌아 갈 것이며, 신정부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결코 구 왕실이 신정부의 건국 사업에 어떤 방식으로도 훼방 놓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라는 발표와 함께 정식 이양 받았다. 말하자면 제도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이력으로도, 의례적으로도, 대중의 시선으로도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민족 해방 운동의 유일무이한 주도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어찌 재해석의 여지가 없다
  49. 진짜 평등한 민주적 자유 선거가 벌어졌다면 공산당이 완승했을 거라는 것은 이념에 편향 된 좌파만의 평가가 아니라, 당장 그 시절 당시 남베트남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응오 딘 지엠을 미국으로 대려와 정계, 학계와 커넥션을 깔아 주어 미국이 그를 간택하게 만들고, 이후 케네디, 존슨 정부가 대대적으로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도록 여론을 주도한 미시건 주립대 베트남 고문단의 윌리엄 피셸 교수도, 당시 주월 미 해병대 특수부대 고문으로 있었으며 현대 베트남전쟁사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마를 비롯한 고위 군인들도 만장일치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양쪽 모두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은 베트남의 민주화 운운하면서도 약속 된 56년 전국 총선을 일방적으로 불이행하도록 조치하였고, 북베트남 정권은 그쪽 나름대로 멍청하게 이 약속을 믿고 디엠 정권이 자신들에게 접촉 하기를 기다리다가 디엠 정권 아래 개박살나고 있는 남부 당원들이 제발 무장투쟁 좀 하게 해 달라고 하도 사정복걸해서 아래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개전 지시를 한 것이었다. 출처는 남베트남 유민 출신 미국의 여성 역사학자이며, 전쟁 당시 사이공의 베트콩 포로 심문관으로 일했던 쯔엉 판 마이 엘리엇이 번역한 포로들의 베트콩 지원 동기 모음집. 해방 당시 조선 좌익들 중에서도 자체적인 세력, 지지기반은 아무것도 없었던 마적단 주제에 소련의 간택을 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다른 좌익들은 물론, 전국의 반을 무단으로 쌈싸먹은 북한 정권과 동일선상에서 비교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50. 심지어 50년대 후반, 양쪽 정권 둘 다 방금 수립 되었고, 북베트남 정권이 토지 개혁 문제와 코민테른의 제제로 제대로 남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두 정권 다 내정에 치중했던 시기, 남반부의 디엠 정권도 나름은 토지 개혁을 해 본다고 농촌에 관료들을 파견 했을 때 분단 정권 수립 이전 이미 월맹 치하에 토지 재분배가 다 이루어져서 몇몇 관료들은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그 상태를 방치했고, 다른 관료들은 이미 빈농들에게 나누어 진 토지를 지주에게 다시 돌려 주고 사이공 정권의 입맛 대로 재처분 하려다가 지역 베트콩 요원들에게 암살 당하는 경우 또한 있었다. 애초에 남베트남 정권은 1960년대 중반 북베트남이 남반부 해방 전쟁의 개전을 공포하고 베트콩의 무장 봉기를 허락하자 얼마 되지도 않아 수도권 바로 앞에서 벌어진 동호이 전투에서 개박살나고 나라가 망할려고 하는 걸 미군의 지상군 투입으로 그나마 10년 생명연장 된거였다. 출처: J. Race, “War Comes to Long An”, from War Comes to Long An: Revolutionary Conflict in a Vietnamese Province, (Berkeley: 2010)
  51.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반전운동가가 된 론 코빅이 쓴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
  52. 미국의 미덕이라 불리는 가치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가 감독한 또 하나의 작품인 Wall Street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관한 내용의 지금의 상황에 대입해서 본다면 훌륭한 작품이다.
  53.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다.
  54. 앞부분에 디엔비엔푸 전투가 묘사된다.
  55. 심지어 전에 써 놓았던 사람은 람보하면 근육남이 기관총들고 갈기는 장면이 생각나는 사람들도 있겟지만, 배경은 전부 베트남전쟁으로, 영화에선 베트남인들이 나쁜놈으로 등장한다라고 했고, 미국이 치욕스런 과거를 인정하기 싫어서 한거지만 역사왜곡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라고 써놓았는데, 완전한 헛소리로 베트남인들이 람보의 적으로 간접적으로라도 등장하는 것은 2편이 유일하다.
  56. 베트남에서 실종(나중에 불에 타죽은 것으로 밝혀짐)된 애인을 그리워해서 타락해가는 여교수의 심리를 그렸다. 파월용사 옷이 예비군 동대 옷인건 넘어가자
  57. 베트남 전을 최초로 극의 주제에 넣은 작품, 참전용사가 전쟁 후유증으로 고뇌하다 창녀를 만나서 치유해간다는 영화이다. 국내 촬영 베트남전은 완전히 동네 뒷산 병정놀이
  58. 2012년에 흔치 않게도 베트남 게임회사에서 만든 베트남판 콜 오브 듀티 게임이며 배경 시기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프랑스군이 적으로 나온다. 그리고 서방에서 만든 시궁창스러운 분위기의 베트남전 매체와 비교해서 베트남 사람들 시점에서 본 프랑스와의 독립 투쟁을 주제로 하다 보니 분위기가 인피니트 워드 콜옵 수준으로 밝다(...) 거기다 블랙 옵스랑은 다르게(...) 장비 고증이 괜찮아서 위의 장비 목록 항목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총기류(프랑스군,미군,영국군 무기나 공산권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리사카,남부, (NPC 전용 한정)자돌폭뢰(?!) 같은 일본군 물건까지)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 소재 자체는 매우 신선하지만 그래도 역시 유사 나치 좀비 모드나 주인공 죽이기(...) 같은 것까지 콜 오브 듀티에서 가져온 것이 평점에 마이너스가 된 듯. 단 이 회사가 사상 처음으로 만든 FPS라는 것도 감안해 두자.
  59. 동유럽 게임 개발사 프테로돈에서 제작한 FPS게임으로 싱글플레이어와 코옵으로써 가장 베트남전을 잘 구현했다는 게임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베트공의 터널 기지에 침투하는 임무는 폐쇄 공포증을 느끼게 할 정도. 다만 속편은 망했다.
  60. 베트남전을 다룬 전투 비행 시뮬 게임. 게임 시스템상 공중 급유가 구현되어 있지 않아서 지도가 약간 작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 당시 미군 조종사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참전했던 분들도 이 게임을 가끔 하신다고 한다. 어떤 분은 자신이 실전에서 가져온 건 카메라 영상과 F-100켐페인 화면을 영상 편집해서 올리기도 하셨다. http://vimeo.com/2710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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